韓國史 알아야

(충무공) 이순신

yellowday 2011. 4. 10. 21:54

                 
이순신
1545년 4월 2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인현동)
1598년 12월 16일
조선 노량해협
전사(총격에 의한 사망)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공
군인, 관료
유교
상주 방씨(정실), 해주 오씨(소실), 부안 여인, 최씨
적자녀 3남 1녀, 서자녀 2남 2녀
아버지 덕연 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형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Kingweapons.jpg
이순신의 초상
별명 충무공
태어난 곳 한성부 건천동 (인현동)
죽은 곳 노량해협
복무 조선
최종 계급 품계:정2품 정헌대부
관직: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지휘 조산보만호
전라좌도수군
삼도수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한산도대첩
명량대첩
기타 이력 선무공신 1등 공신
덕풍 부원군
추증 좌의정
가증 영의정

이순신 동상




이순신(李舜臣, 문화어: 리순신,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은 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덕수, 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행하고 효심을 가진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 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변(李邊)[1]의 후손이다

어린 시절 [편집]

이순신은 1545년 한성 건천동(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2][3][4]

임진왜란 이전 [편집]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5]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6]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 하면서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출처 필요]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편집]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쓰던 거북선 모형

1592년 음력 4월 13일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옥포 해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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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사천 해전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사천 해전입니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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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 [편집]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 [편집]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7]

웅포 해전 [편집]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으로 겁먹은 일본 수군은 과감한 전투 대신 후퇴와 숨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편집]

음력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백의종군 [편집]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8]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도움으로 결백이 증명되자,[출처 필요] 음력 4월 1일에 사면되었고[출처 필요]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편집]

칠천량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고, 원균은 상륙 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명량 대첩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명량 해전입니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또한 92척을 파손 및 대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 해전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노량 해전입니다.
노량해전 지도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9]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10] 그는 54살의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공식적으로는 밝혀졌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명분상으로 전사한 날, 유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사후 관직 및 사건 [편집]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1999년 충무공 탄신일을 앞두고 한 무속인이 이순신과 일가의 묘에 휘발유가 묻은 식칼과 쇠막대기로 꽂은 직후 음료수 병에 든 제초제를 마시고 자살 시도하였고 경찰에 체포되어

충무공이 꿈에 나타난 뒤 머리가 아파 그 자손들의 기를 끊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며 “이렇게 하면 떨어져 살고 있는 자녀와 다시 결합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라고 진술하였다.[11]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함께 1,2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12][13]

자살설 및 은둔설 [편집]

자살설과 은둔설의 모티브들 [편집]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보다 그를 지원했던 인물인 유성룡이 적과의 화해를 주장했다고 공격을 받아서 관직을 잃을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전투 중 지휘관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순신은 왜 갑판 맨 앞에서 손수 일본군을 쏘다가 적탄에 맞았을까? 과연 이순신은 4각 철판이 부착된 방탄용 환삼을 입고 있었는가?[14]

이순신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순신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자신의 부장 이순신(李純信)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외에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비밀리에 은둔 후 자연사하였다는 주장[15]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왜란이 끝난 이후 국가에서 재물을 내려 국장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는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16년이 지나고 공의 묘를 이장한데서, 이때에 이르러 진짜로 사망한 충무공을 이장의 형식을 빌어 장사를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설과 은둔설에 모티브를 제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당시 사회를 떠돌던 다른 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풍문이 있었고 선조도 이런 풍문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이다.

전란이 끝나고 풍문으로 나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어 역적으로 몰릴 경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그리고 크게는 덕수이씨 가문 전체와 그를 천거하여 공적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던 유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과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재장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피화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동한 김덕령의 의문이 가득한 역모사건으로 인한 사망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던 인물들이 이러한 풍문에 연루되면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16]

임진왜란 중 일본과 휴전을 한 시기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벼슬에 물러나 있던 김덕령(金德齡)은 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로 향하다 난이 진압되어 회군하였는데,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 벼슬에 물러나서도 난의 토벌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 충정이 오히려 공격당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을 묶고 있던 포승줄을 힘으로 끊고 형옥의 담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으로 힘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반역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않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장이었던 최담령 또한 처형 당하였다.

같이 풍문에 연루되었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홍계남(洪季男)은 다행히 풀려났지만, 이때의 풍문이 연결된 많은 의병장들이 옥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이러한 풍문에 또 다시 연루될 것을 저어하여 의병들을 해산하고 운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끝나고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다시 은둔하였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한 관음포 앞바다로 인근에 이락사가 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과 "은신설"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안방준의 《노량기사(露梁記事)》에 따르면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이마에 맞아서 갑판 위에 쓰러져 기절(氣絶)하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다가 그도 또한 적탄(敵彈)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기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린 송희립은 옷을 째어 이마 상처를 동여매고 앉으려 하니, 이순신의 아들인 회(?)가 곡(哭)을 하는지라, 송희립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이순신의 갑옷을 풀어 그 시체(屍體) 위에 얹어 놓게 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旗幟)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督戰)하니, 적군(敵軍)은 대패(大敗)하고 익사(溺死)하는 자 무수(無數)하고, 드디어 둔주(遁走)하거늘, 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곡(哭)을 발(潑)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任命)되었다.

? 《노량기사(露梁記事)》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든,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 생활을 한 것이든,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7]

평가 [편집]

국내 이순신의 평가 [편집]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서애 유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세계 속 이순신의 평가 [편집]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平八?),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李舜臣?書)》

[18][19][20][21][22]

이순신을 이용한 정치적 의도 [편집]

若無湖南 (약무호남), 是無國家 ( 시무국가 )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한 말로,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다”는 뜻이다.)

[23][24][25][26]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1564년(명종 19)∼1627년(인조 5)}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르면

삼가 생각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이런 까닭에 어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쳐 바닷길을 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난리 중에도 옛 정의를 잊지 않고 멀리서 위문편지를 보내시고 아울러 각종 물품도 받게 되니, 진중(陣中)의 귀물이 아닌 게 없어 깊이 감격하여 마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에야 더러운 적을 소탕하여 없애고 예전의 종유(從遊)하던 회포를 실컷 풀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대하니 슬픈 마음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이 내용에 본디의 뜻인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는 초토화 상태였으며 호남지역이 곡창지대이고 유린당하지 않은 곳으로 호남을 보루로 막을 거란 뜻으로 '호남인들이 적극적으로 왜적에 대항한 결과로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는 말'하고는 해석상에 차이가 있으며 명량해전1597년이며 지역주의와는 무관하다.[27][28][29]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장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유지된다.

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而戰鼓鳴卽 皆夜半逃散也
경상도 장졸은 불러 모아 놓으면 평소에는 말없이 군량을 받아 먹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야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마는도다.

慶尙徒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劫姦 又甚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의 무리는 앞머리를 깎고 왜옷을 걸치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 전라지역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오히려 왜적보다 심한 바가 있다.

위의 세 인용문은 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30][31]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中)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 선조,《卒逝後賜祭文》,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 《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