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원효대사

yellowday 2011. 4. 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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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617년~686년 경상북도 경산시)는 신라고승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薛), 속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호는 화정(和淨)이다. 설총의 아버지이다.

 

생애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 담날의 아들로 상주(湘州)[1]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沙羅樹) 아래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어려서 서당 또는 신당으로 불렸으며, 15세 때 또는 28세 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資質)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遼東)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唐項城)[2]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라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3] 그 뒤 분황사(芬皇寺)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4]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라며 요석궁(瑤石宮)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薛聰)[5]을 낳았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주었다.

원효는 실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이며 또한 으뜸가는 저술가이기도 하였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