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 幼 序, 友 與 朋,
장 유 서 우 여 붕
zh?ng you xu y?u yu p?ng
君 則 敬, 臣 則 忠,
군 즉 경 신 즉 충
j?n ze jing chen ze zh?ng
此 十 ?, 人 所 同。
차 십 의 인 소 동
c? shi yi ren su? tong
유비와 삼고초려(三顧草廬)
사람이 지켜야 할 10가지 도리 즉 ‘십의(十義)’란 원래 『예기(禮記)?예운(禮運)』에 나오는 말이다. 아버지는 자애롭고(父慈) 자식은 효도하며(子孝) 형은 어질고(兄良) 아우는 공손하며(弟弟) 남편은 의리가 있고(夫義) 아내는 순종하며(婦廳) 어른은 은혜롭고(長惠) 어린이는 순종하며(幼順) 임금은 어질고(君仁) 신하는 충성스런(臣忠) 이 열 가지를 사람의 의리라고 했다.
한편 『三字經』에서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10가지 도리를 꼽고 있다. 특히 아무리 尊貴존귀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뜻을 공경히 받들고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선 어질고 능력 있는 人才인재들을 등용하고, 반드시 그들을 잘 대우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고귀한 신분의 군주가 스스로 몸을 낮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한 사례가 많지만 이중 『三國志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소개한다. 삼고초려란 후에 촉한(蜀漢)의 황제가 된 유비(劉備 161-223)가 당시 숨어 지내던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오두막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 말년 환관과 외척 세력의 專橫전횡에 의해 황제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도처에서 農民反亂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각지에서는 英雄豪傑영웅호걸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세력을 다퉜다. 이중 서한(西漢) 皇室황실의 몰락한 후예인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20년 가까이 한나라 황실을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200년 원소와 조조 사이에 벌어진 관도(官渡) 대전 이후 천하의 세력은 조조에게 급격히 기울고 유비는 의탁할 곳이 없어 도처를 떠돌아야 했다.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성 서남쪽)에 정착한 유비는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는 마침 양양 땅의 사마휘(司馬?)에게 제갈공명과 방사원을 추천받았고, 영천 사람 서서(徐庶)에게서 제갈공명을 반드시 예를 갖춰 맞이하라는 권고를 들었다.
한편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자가 공명(孔明)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17세 되던 해 자신을 돌봐주던 숙부마저 사망하자 융중(隆中 지금의 호북성 양번 서쪽)에 은거해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평소 세상을 구하려는 큰 抱負포부를 품었고, 당시 지식인들은 그가 언제든 용처럼 하늘로 날아올라갈 것을 예상하며 와룡선생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비의 나이는 47세로 무려 20세나 연하인 공명을 얻기 위해 스승의 예를 갖춰 관우와 장비를 대동하고 융중으로 달려갔다. 첫 번째 방문에서 유비는 마침 공명이 집을 비워 만날 수 없어 할 수 없이 예물만 전하고 돌아와야 했다. 닷새 후 유비는 다시 관우와 장비를 이끌고 이른 아침부터 공명의 초가를 찾았지만, 불행히도 역시 만나지 못했다. 성질 급한 장비가 불만을 터뜨렸고 신중한 관우마저 불만을 표출했다. 두 번이나 찾아왔음에도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공명이 진정한 인재라면 열 번이라도 찾아야 한다면서 두 아우들을 다독거렸고 닷새 후에 다시 오기로 했다. 닷새가 지나 유비는 융중을 세 번이나 방문한 끝에 드디어 공명을 만날 수 있었다.
유비의 誠實성실하고 謙遜겸손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인 공명이 당시 천하정세를 설명하며 천하를 3분하는 계책을 알려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다. 공명은 융중대책에서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천하정세와 유비가 취해야 할 정책 및 군사 활동의 기본전략을 제시했다. 이에 유비는 공명의 정확한 정세판단과 논리정연한 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유비가 늘 스승의 예로 나이 어린 공명을 대하자 유비의 최측근인 관우와 장비마저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유비는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며 더 이상 불만을 갖지 못하게 했다. 과연 유비의 판단은 정확했고 제갈량은 이후 유비 진영 큰 공을 세웠으며 천하를 삼분한 촉한(蜀漢) 건립에 기여했고 촉한의 초대 승상이 되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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