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을때
'젖냄새' 라는 작은 제목의 내용이 이순신의 셋쩨 아들 면의 이야기였다.
아비와 형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21세의 어린나이로
가족과 마을을 지키다가 죽는 내용인데
아비의 애절함이 너무 슬퍼서 나도 펑펑 울며 읽었었다.
그리고 면의 무덤이 현충사에 있다는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면에게 '꼭 한 번 찾아갈께!' 라고 약속했었다.
현충사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 '충무문'
충무문으로 들어가기전에 왼쪽으로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있다.
난중일기등 기록물들, 직접 사용하셨던 무기를
해전도, 왜의 전선과 무기들...등이 전시되어 있다.
충무문을 들어서며 보이는 모습
구본전
1932년 증건된 당시의 현충사 사당 본전이다.
현충사 성역사업으로 새본전이 세워지면서 1968년 옮겨졌다.
현충사 현판은 숙종이 내려주었다고함.
이 나무는 '반송' 이라는 소나무 종류인데
가지가 밑둥부터 생겨서 나무 모양이 동그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반송이 경내에 많이 있구요.
느티나무 은행나무등 300년 이상된 나무들이 많아서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충사로 들어 가기전의 홍살문
양쪽의 소나무들의 가지들이 기이하게 길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 충의문을 지나야 현충사가 있습니다.
현충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이 모셔있고
분향대가 있습니다.
내 앞서 가던 남자 세분은 향을 피우고 절을 했습니다.
현충사 옆과 뒷쪽은 온통 대나무밭
이날 바람이 엄청 불었는데 바람에 대나무 몸부비는 소리 요란했습니다.
현충사에서 옛집으로 내려 가는길
내가 그곳에 다녀온지가 두주일도 넘었으니
지금쯤 저 목련이 활짝 피었다가 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이곳은 배롱나무도 많이서 배롱꽃 필때 오면 좋을텐데 다시 올수 있을런지...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오직 하나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을 보러온것
이순신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소년시절에 외가인 이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아버지 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순신의 유년시절은 가난했다고 한다.
이곳 아산으로 이사 하게된 이유도 가난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려'인데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등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시면
그 편액을 걸어 두는 건물로 마을 입구에 세운다.
이 정려도 충무문울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다섯 칸인걸 보니 모두 다섯분이 편액을 받으셨다.
옛집과 조금 떨어져 산기슭에 이면의 묘가 있습니다.
내 셋째 아들 이면은 나보다 먼저 적의칼에 죽었다.
적의 칼이 아비 자식의 순서를 따라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유년 명량 싸움이 끝나고 내가 다시 우수령으로 수군을 옮긴 겨울에 .
면은 아산 고향에서 죽었다.
면은 어깨로 적의 칼을 받았다.
적의 칼이 면의 몸을 새로로 갈랐다.
죽을때, 면은 스물한 살이었다. 혼인하지 않았다.
(칼의 노래에서...)
아내가 면을 낳을 때 나는 함경도 북쪽 끝 두만강가 삼수에서
여진족과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육군의 종팔품 권관이었다.
그때 나는 서른세 살의 젊음이었다.
삼수갑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고향 아산으로 돌아왔을때 면은 첫돌을 막 넘긴때다.
내가 보기에도 면은 아비를 닮았다.
눈섭이 짙고 머리 숱이 많았고 이마가 넓었다.
사물을 아래서부터 위로 흝어 올리어 빨아당기듯이 들여다보는
눈매까지도 나를 닮아 있었다.
아비를 닮고 태어나는 그 씨내림이 나는 무서웠다.
(칼의 노래에서...)
작고 따스한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비린 젖냄새 속에서 내가 느낀 슬픔은 아마도
그 닮음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내가 적장 구루지마의 머리를 돛대에 걸었으므로,
적들은 내 아들의 머리라도 얻으려 할 것이었다.
그때 면은 고향에서 제 어미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조카들을 건사하고 있었다.
(칼의 노래에서...)
가토의 특공대 50여명은 이순신의 아들을 죽이기 위하여
마을을 불지르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면은 21살의 나이로. 식구들과 마을을 지키려다가 죽는다.
21살.
남자의 21살은 얼마큼 성장한걸까?
우리 아들 둘은 똑같이 대학 들어가서 1년 다니고 군대에 갔었으니까.
우리 아들들도 21살쯤엔 이순신 처럼 군인이었다.
한아들은 해안경비초소에 있었고
또 한아들은 비무장지대에 있었다.
둘다 최전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휴전중의 최전방이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이면은 전선없는 전쟁터에서
죽일려고 앙심을 품고 처들어온 50명의 특공대와 맞서야 했다.
21살.
어찌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해연님의 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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