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교수직 버리고 전쟁터 간 '재벌 2세' 철학자… "삶을 변화시켜야 진짜 철학"

yellowday 2013. 4. 6. 08:39

입력 : 2013.04.06 03:03

[불멸의 저자들] 비트겐슈타인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일을 좀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겨 학자라면 누구나 선망할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직을 스스로 그만둔 사람이 있다. 비단 대학뿐이랴. 그가 보기엔 온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했다. 정신이 죽어가고 사유가 사라지고 신이 떠나가는 이 황무지에 한 줄기 빛을 던지고 간 시대착오적인, 아니 반시대적인 사람. 그의 이름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1889~1951·사진)이다.

그는 왜 지성의 전당을 못마땅해했을까. 그가 쓴 다음 구절이 한 실마리를 준다. "철학을 함으로써 논리학의 난제 따위에 관해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을 뿐, 정작 삶의 중요한 문제에 관한 사유는 심화하지 못한다면 과연 철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삶의 중요한 문제에 관한 사유를 심화한다는 것은 다시 그 문제에 대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유로써 자신을 변화시켰느냐 하는 데 있다. 그 변화가 없다면 그가 늘어놓은 말은 그냥 말에 그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치유 행위로 보았다. 철학자는 영혼의 의사이고, 박사를 의미하는 약어 'Ph. D.'의 원래 의미도 철학 의사(doctor of philosophy)이다.

/AFP
우리 시대에도 철학자와 박사는 넘쳐난다. 그러나 자신의 병도 고치지 못하는 그들이 남의 병은 어떻게 고치고 세상의 병은 또 어떻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직업인, 전문인일 뿐이다. 시대는 더욱 궁핍해지고 사람 마음은 중병으로 고사 직전인데 그에 비례해 그럴싸한 말들은 더욱 세련된 형태로 범람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시대의 이러한 왜곡에 절망했다. 철학이 치유는커녕 오히려 병을 부르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한 시대의 병은 사람의 삶의 양식 변화로 치료된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라는 병 치료는 한 개인이 발명한 약이 아니라 사유와 삶의 양식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여기서 한 개인이 발명한 약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으로 새길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추구한 것은 그러한 약 발명이 아니라 사유와 삶의 양식 변화였다. 그리고 사유와 삶의 양식 변화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유가 삶의 양식 변화를 일으키고 삶의 양식이 사유 변화를 일으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신념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고 실험했다. 백만장자의 아들이었지만 상속받은 재산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익명으로 모두 나눠주고 시골 학교 교사, 정원사, 건축가, 잡역부로 일했으며 노르웨이의 피오르 계곡 벼랑에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칩거했다. 그러나 이를 재벌 2세의 무한 도전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변화와 구원에 진정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탈장으로 징집이 면제된 상태였는데도 1차 세계대전에 자원해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을 전전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자기가 존경한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처럼 "오로지 죽음만이 삶에 의미를 준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엄습하는 죽음 앞에서 그는 '논리철학논고'라는 위대한 작품을 빚어냈다.

'논리철학논고'는 직관적 사유의 산물이다. 분석철학의 성경으로 꼽히고 있지만 정작 어떠한 분석철학적 논증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범람하는 말의 질서와 한계를 확정하고 이를 통해 보이는 세계를 아주 명징하고도 함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 말미에는 이 책의 말들도 무의미하며 사다리일 뿐이므로 사다리를 오른 사람은 이를 차버리라고 권고한다. 어떻게 무의미한 말이 사다리 용도로 기능할 수 있는가.

의미 있는 말은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돈 버는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하고 이를 매뉴얼 삼아 쓸모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철학 또는 인문학은 그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각성과 비약을 위한 가혹한 통과의례, 성인식, 피를 부르는 희생제 같은 것이다. 자신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혼란과 파국을 체험하고 거기서 이를 극복할 자신만의 길을 새로 열어 가면서 사람은 철이 드는 것이다. 철학은 얼을 벼리는 담금질이요 혼이 거듭나는 굿판이다.

도시의 안락함과 성공 신화로 세팅된 현대인에게 비트겐슈타인은 불편한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를 통해 우리가 저마다 자기 앞의 삶에 눈뜨고 세상을 밝힐 의지와 용기와 안목을 얻는다면 그의 삶과 철학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