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중국어: 西太后, 병음: Xī Tàihòu 시어타이후[*], 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는 청나라 말기의 독재
권력자이자 함풍제의 세 번째 황후이며, 동치제의 생모로 일명 자희태후(중국어: 慈禧太后, 병음: Cíxǐ Tàihòu 시지타이후[*]),
노불야(老佛爺)라고 지칭되며 성은 예흐나라(葉赫那拉, 엽혁나랍), 이름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출신지가 안후이 성 우후설,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설, 산시 성 창즈설 등으로 되어 있다. 시호는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
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줄여서 효흠현황후
(孝欽顯皇后)라고 부른다.
생애
엽혁나랍 혜징이라는 관리의 딸로서, 17세에 문종의 왕비가 되었다. 문종이 죽자, 아들 목종과 조카 덕종을 내세워 약 40년 동안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목종이 20세의 나이로 죽자 조카인 덕종을 내세워 정권을 잡는다. 덕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개혁적 성격을 지니게 되자 그녀는 덕종을 유폐하고 덕종이 10년 뒤 죽자 공종을 세우고 하루 뒤 죽는다. 그녀는 그녀의 생애
동안 노리는 서양 세력이 미치던 당시의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운동을 억압하였다.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외국 세력을 내쫓겠다는 농민들을 도와주다가, 도리어 외국 세력에게 꺾여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1]
섭정체제
동치제의 생모이자 광서제의 큰어머니, 이모이다. 황제를 뛰어넘는 권력으로 중국대륙을 48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녀는 함풍제의 의귀비(懿貴妃)에 책봉되었고(책봉될 당시 함풍제의 생모인 태후가 서태후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거세겠다며 귀인에 책봉시킨다. 후에 사코타(동태후)가 공주를 출산하자 서태후는 임신을 밝히고 아들(동치제)을 생산한다.
그 보답으로 서태후는 후궁에서 황후로 간택되어 서궁의 자희황후라고 불리게 된다.) 동치제 즉위 후,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가 같이 섭정을 하면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洋務)운동이 시작되었다.
두 태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섭정하는 동시에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정국에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런 와중에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은 동치제 간의 알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동치제는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이유로 서거하였다. (동치제는 16세에 승하하였고 자희태후가 간택한 황후 알루트<효철의황후>는 물러나서
동태후 사코타(자안태후)궁에서 지낸다.)
그리고 동치제가 서거하고 서태후는 자신의 질녀가 시집간 순친왕의 아들을 황제로 삼고 수렴청정이라는 명분하에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던 와중에 황제가 장성하여 서태후를 가둘 계획을 세우자 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황제를 유폐시키고
후궁인 진비는 골방에 가두어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한다. 그렇게 혼란이 지속되던 중 8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별궁인 원명원이
불타게 된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책등 개혁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과 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진사가 된 캉유웨이는 이후 여러 차례 청나라를 개혁할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려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중 중요한 것이 1889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권위에만 의존했으며,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의화단
의화단은 원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해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킨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 '대도회'(大刀會)의 일파이다.
원래는 반청 단체였는데 청나라 말기 서태후는 이들을 구슬려 외세에 대항하는 단체로 삼았으며, 반청(反淸)의 구호대신
"청조를 돕고 외국을 멸한다."(부청멸양, 扶淸滅洋)의 구호로 바꾸게 하였다. 1900년 서태후는 이들에게 열강 8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게 했다.
그러나 열강들에 의해 베이징은 함락되었고, 서태후는 시안으로 도망가게 된다. 의화단은 진압되었고 1901년 신축조약에서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불평등 조약까지 맺게 되었다.
말년
서태후는 1908년 11월 15일 붕어하였고, 죽기 직전 부의를 황제로 정하면서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겼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에 종말을 고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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