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바다 따라 걷는 700리길… 바람도, 사람도 부산에서 봄을 맞는다

yellowday 2013. 3. 12. 17:02

 

[부산 갈맷길]
바다·산·강·호수 어우러진 풍경과 이야기 가득한 항구·시장 매력 겸비
갈맷길 걷는 관광객 부쩍 늘어… 스탬프로 추억 남기는 여행수첩
섬 투어 등 체험 프로그램 준비… 지역 대표 관광상품으로 변신 중

봄이다. 아직 꽃샘 추위란 '복병'이 남아 있지만 바람 속의 칼은 무뎌졌고 햇살은 따스해졌다. 메말랐던 나무가지들도 꽤 물기가 올랐다. 매화, 목련, 유채, 벚꽃, 진달래…. 곧 산에 들에 꽃이 흐드러질 것이다. 그러면 노랑, 분홍, 빨강이 마음에 '자연 빛'을 드리운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그 속에서 걷는다. 목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옷, 신발, 가방에 코끼리, 새, 갈고리 등등이 없어도 된다. 그저 편한 신발에 차림이면 그만이다. 공항이나 역에 내려서 버스·지하철을 타면 된다. 용돈이라면 요깃거리 값 정도면 충분하다. 단, 시간은 필요하다. 손잡고 혹은 얘기 나눌 동행이 있다면 '비단 위에 꽃'이다.

부산 남구 이기대공원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야경./남강호 기자
'길'. 사람이 걷는 무대다. 화사한 봄날, 걷는 길 중에도 부산·울산·경남의 산책로는 아주 매력적이다. 바다, 산, 강, 호수 등 4가지를 모두 품고 있는 사포(四抱)의 길이기 때문이다. '사포'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4가지'라도 그 안엔 천(千), 아니 만(萬)의 얼굴을 한 자연이 담겨 있다.

부산 서구 암남동 암남공원 해안길./남강호 기자
부산의 갈맷길을 보자. 바닷길(1~5코스), 산길(6-2, 7, 9코스), 강길(6-1코스), 호숫길(6-2, 7-2코스)로 분류된다. 모두 '700리(263.8㎞)'다. 꽤 긴 거리다. 그렇지만 차나 배, 비행기를 타고 오랜 시간 멀리 가야 하는 곳에 있지 않다. 대개 지하철역, 버스정류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도심과 지척이다.

그런데 그 안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도심의 소란함, 분주함, 번잡함이 전혀 없다. 봉쇄 수도원, 심산유곡 절집처럼 호젓하고 고즈넉하다. 문탠로드(2-1코스)·이기대공원(2-2코스)이 그러하고 절영산책로(3-3코스)·성지곡수원지(6-2코스)도 그렇다. 손닿을 듯한 곳에 큰 아파트 단지들이 즐비하고 몇 걸음만 옮기면 큰 도로가 지난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다른 별이다. 지저귀는 새들의 낯선 언어에 즐겁고 솔바늘에 씻긴 바람이 싱싱하다. 생강나무, 돈나무, 감탕나무, 서어나무, 팥배나무…. 노루귀, 얼레지, 족두리풀꽃, 마삭줄…. 이런 낯선 이름들이 눈 앞에 정겹게 서있다. 쇠백로, 큰고니, 혹부리오리, 좀도요 등 철새는 어떤가? 짱뚱어, 버들치, 경모치 등 물고기들은?

이런 길을 걸으면 '상구보리(上求菩提)'다. 세속을 떠나 청정한 곳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KTX의 속도로 달리던 도심의 시간은 이곳에서 굼벵이 운행을 한다. 몸이 느려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면 시간도 속도를 줄인다. 아니 멈추는 듯하다. 시간의 운동이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형이 아니라면? 삶이 아주 달라질지 모른다.

매일 성지곡수원지 길을 걷는 강연가이자 오지여행가인 도용복(69)씨는 "하늘로 쭉쭉 뻗은 편백 숲속을 걷다보면 마음이 씻겨지고 온갖 고민들이 술술 풀린다"며 "매일 깨달으며 사는 삶이 그런 것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에서 바라본 일몰./남강호 기자

부산 갈맷길엔 '구름 위의 산책'만 있는 게 아니다. 일제강점, 해방, 6·25전쟁, 근대화와 성장…. 밀랍돼 남아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도 그 길에 있다. 1-1코스인 기장군 월내엔 보부상 수반의 공덕비가 있고 기장군 임랑엔 고(故) 박태준 회장의 생가가 있다. 3-2코스에 있는 귀환동포·월남파병의 부산항, 6·25 전쟁의 피란민들이 몰렸던 영도다리와 원도심 산복도로(3-2, 3-2코스)….

시간이 쌓이고 사연이 모인 인문(人文)의 창고인 셈이다. 사람이 북적대는 저자거리에서 깨우쳐 대중을 구한다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이다. 그 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까? 어쩌면 부산의 갈맷길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씨줄과 날줄로 새로운 그물, 새로운 마음을 엮어내는 산파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사포(四抱)길

‘사포’는 풍수학에서 많이 쓰는 ‘삼포(三抱, 산·강·바다를 낀 명당자리)’란 용어에 호수를 더해 만든 조어(造語). 즉, 산·강·바다·호수를 품고 있는 길이란 뜻이다.

 


울산 하늘억새길·경남 지리산 둘레길

울산의 ‘태화강 100리 길’ 또한 도심 속에 있다. 가지산 아래 울주군 석남사에서 언양을 거쳐 하류쪽인 현대자동차수출부두(성내삼거리)에 이른다. 총 연장 45㎞다. 올해 말 산책길 주변 정비작업이 모두 마무리된다. 이 길은 거듭남, 설화의 길이다.

한때 공해의 대명사였던 울산을 친환경도시로 탈바꿈시킨 아이콘 중 하나다. 연어가 돌아오고 십리대숲·억새의 서걱임이 정겨운 태화강을 끼고 걷는 길이다. 또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선사시대 인류의 얘기를 품고 있는 반구대암각화, 천전리 각석 등이 이 길에 있다.

반면 울산의 ‘하늘억새길’은 해발 1000m가 넘는 영남 알프스 산 위에 있다. 간월재에서 신불산과 영축산, 천황산, 능동산을 거쳐 다시 간월재로 이어지는 총 29.7㎞의 길이다. 국내에서 가장 긴 억새탐방길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둘레길이다. 이곳의 억새군락은 매년 가을, 감탄사 ‘억’ 말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의 신비와 넉넉함을 품고 있다. 경남·전남·북 등 3개도에 걸친 274㎞에 이른다. 고갯길, 숲길, 계곡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시골 산지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길을 망라하고 있다. 원시림의 숲, 깊은 계곡, 오염되지 않은 옛길, 정다운 시골마을 등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도를 설파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