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49] 고야의 전쟁

yellowday 2013. 1. 5. 07:22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들 중에 전쟁미술이 있다.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나 승리를 재현하는 전쟁화나 전쟁조각은 국가의 영광을 과시하거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중요한 미술이었다. 격렬한 움직임과 흥분, 공포를 동반하는 전쟁미술은 또한 미술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했다. 대부분 전쟁의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지던 전쟁미술이 전쟁의 폐해나 희생자 또는 피해자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던 것은 19세기의 근대기에 들어서였다.

화가 고야(1746~1828)가 활약했던 이 무렵의 스페인은 무능한 왕과 부패한 정부, 그리고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잔인함과 야만성, 공포를 직접 목격했던 고야는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인 1814년에 '5월 3일의 처형'을 그렸다. 1808년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시민들의 궐기, 그 이후의 검거와 학살 장면을 그린 이 그림에서 고야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폭력 집단과, 용감했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을 대조시켰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인간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 학살의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는 어둠 속에 있는 성당은 희망과 구원을 상징한다.

5월 3일의 처형.
고야의 말기 작품에서는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중병으로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칩거하면서 상상 속의 악령들에 사로잡혔다. 74세가 된 1820년부터 3년 동안 그는 악마와 악몽이 지배하는 17점의 음산한 그림들을 그려 자신의 집에 걸었는데, 그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이 그림들은 나중에 '블랙 페인팅'으로 불렸다. 신화에 등장하는, 자신의 아들을 삼키는 농업의 신 '새턴' 그림을 식당에 걸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충격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후 50년 후에야 비로소 공개된 이 그림들은 사실 그가 살던 시대의 정치와 사회의 광기, 위선과 부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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