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개관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화려한 보자르 양식의 기차역을 개조한 건물이다. 이 미술관 건립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퐁피두 대통령 때부터로, 프랑스 미술의 최고봉이었던 19세기 미술품을 전시하려는 목적이었다. 문제는 19세기 미술관 전시의 기점을 언제부터로 보는가였다. 퐁피두 대통령은 1860년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전시관으로 만들기를 바랐고,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1830년 혁명을 그린 들라크루아의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부터 시작하기를 원했다. 미술관이 완공되고 전시를 준비하면서 논쟁은 절정에 달했다. 1981년 사회주의 정권을 창출한 미테랑 대통령이 미술관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한 역사학자 르베류는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던 1848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사실주의 미술이야말로 19세기 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관장과 학예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의 안을 관철시켰다.
▲ 오르세 미술관
미술관 1층에는 쿠르베, 밀레 등의 사실주의 회화가 전시되었고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3층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2층에는 그동안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카데미적인 살롱 회화들이 전시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아래층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위층부터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르베류는 미술품은 역사적 자료와 함께 전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드가의 회화 '다리미질하는 사람'을 당시 사용하던 다리미와 같이 전시하고자 했으나 미술전시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실현하지는 못했다.
현재도 이 골격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오르세 미술관은 공예품, 가구, 건축모형 등을 상당수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을 모르는 대부분의 관람자들에게 이 미술관 전시는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활동이 당대의 사회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미술사의 흐름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