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비교하면 당시의 비평은 더 가차없었다. 미술의 개념이나 양식이 급격히 변화하던 당시, 마네나 세잔은 그들의 선구적인 면을 알아보지 못한 평론가들의 악평 때문에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을 제외시킨 데 대한 반발로 1855년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장소 바로 앞에 가건물을 짓고 자신의 작품 27점을 전시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 ▲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이 개념은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평론가 존 러스킨은 사람들의 얼굴에 물감 냄비를 내던진 것 같은 그림의 가격이 200기니나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악평을 썼다.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 재판관이 이틀밖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200기니나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휘슬러는 200기니는 자신이 일생에 걸쳐 배운 지식에 대한 가격이라고 반박했다.
휘슬러는 승소했지만 손해배상으로 겨우 1파징(1/4 페니)을 받았을 뿐 소송비용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습적인 방법에 반발하고 자유로운 예술 표현과 권리를 주장했던 휘슬러나 쿠르베는 그 이후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