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가을 시 모음

yellowday 2012. 11. 27. 07:23

<가을 시 모음> 강인호의 '가을에는' 외

+ 가을에는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강인호·시인)


+ 가을
 
툭……
여기
저기
목숨 내놓는 소리
가득한데
나는 배가 부르다
(나호열·시인, 1953-)


+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안도현·시인, 1961-)


+ 솔로몬의 계절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이영균·시인, 1954-)


+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시인, 1942-)


+ 가을이 오면

나무야
너처럼 가벼워지면

나무야
너처럼 헐벗겨지면

덕지덕지 자라난
슬픔의 비늘

쓰디쓰게
온통 떨구고 나면

이 세상
넓은 캔버스 위에

단풍 빛으로 붉게
물감을 개어

내 님 얼굴 고스란히
그려보겠네

나무야
너처럼만 투명해지면
(홍수희·시인)


+ 가을편지·1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톡,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가을에는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 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볼 일이다
(박제영·시인)


+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가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 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가을의 향기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시인, 1913-1975)

 

+ 가을 노래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