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거스를 줄 알아야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강을 거슬러 오르고,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 속에서 꿋꿋하다. 하물며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휩쓸리는 것은 죽은 것이다. 하류에 죽은 것들이 모여 썩는다.
냇물이든 강이든 여울처럼 아름다운 데는 없다. 그곳은 일종의 '흐름'의 고비, 서양 말로는 '코너워크'에 해당하는데 하늘의 빛은 밤이건 낮이건 반짝이고 물소리는 찬란하다. 물고기들은 그런 곳에 모여 논다. 그곳은 새들도 날랜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이 시는 어느 강의 상류쯤에서 펼쳐지는 그 풍경을 그린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던가. 비 갠 밤하늘에 달이 씻은 듯이 나와 놀고, 그 빛에 은피라미 떼 팔딱팔딱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니 장관이다. 보는 이의 피도 저절로 약동(躍動)한다. 어디 은피라미 떼 같은 이 있다면 발 벗고 뛰어가겠다. 여기서 최선의 '몸단장'은 신발을 팽개치고 맨발이 되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이랴. 자연에 대한 순응과 긍정과 합일의 풍경이야말로 생명의 최상급 오르가슴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저 풍경 그대로 잉태의 과정을 보여준다.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수 있으려면 우리는 저러한 풍경을 마음에 품어야 하리라.
고재종(51) 시인은 일관되게 자신이 나고 자란 터전을 떠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연이 주는 활력과 함께 날로 핍진해지는 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우리의 삶과 정서의 근원인 농촌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돈을 버는 데 급급했던 지난 세기 말 한국 농촌의 자화상을 그의 시편들은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은 "마침내 삭풍설한 되게 치는 날에도 거기 그렇게 정정하게 서서 한층 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의 버팅김은 너무도 의연하다. 그 버팅김의 근력이 실은 제 상처 속에서 뽑아내는 푸르른 울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저, 남녘의 동구마다 정정히 서 있는 느티나무가 시인 내면의 표상인 것이다. 한편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출렁임에 대하여〉) 그의 강둑은 사랑의 '물비늘'을 늘 상영하는 영혼의 은막이 되는 셈이다.
사랑이라고 함부로 이름 붙이지 말자. 저급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거슬러' 맑고 푸른 상류로 올라갈 수 없는, 욕망에 휩쓸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자. 연애에서든, 삶의 터전에서든.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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