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이 시는 허수경(44) 두 번째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시이다. 이 읊조림을 시라 불러도 좋고 구음(口音)이라 해도 좋다. 웅얼웅얼, 중얼중얼, 킥킥……. 뭐라 불러도 좋은데 결국은 시가 될 수밖에 없는 읊조림이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삶. 삶이 상처임을 일찍 알아버린 이에게 독기와 연민은 삶을 견디는 한 방법이니,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당신을 부르는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을 호명하는 것이 또 한 번의 상처임을. 그런데도 부른다. 킥킥, 가엾이 여기며 부른다. 이것은 일종의 동종요법. 상처를 상처로 견뎌가는 참혹한 치유 요법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참혹만이 아니라 생이 몽땅 상처인 것이어서 이 참혹함을 피해 볼 손바닥 만한 그늘도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나도 혼자 가고, 당신도 혼자 가고, 먼 집도 영영 혼자 가는 것임을.
1988년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허수경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처음 읽던 내 나이 스무 살. 〈폐병쟁이 내 사내〉라는 시를 읽던 기억이 난다. 시집 표지에 실린 앳된 여고생 같은 얼굴의 여자가 이런 시를 쓴 게 오싹할 정도였다. 샤먼의 신명처럼 간곡하고 치렁치렁한 리듬으로 가득하던 첫 시집. 그 이후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보낼 때마다 허수경의 노래법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안쓰러운 세상과 당신이 아파서 자기도 아픈 허수경의 비통함은 아주 넓은 진폭으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확장하며 공명한다.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은 두 번째 시집을 낸 직후 돌연 독일로 갔다. 지인들은 그가 곧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는 15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있다. 그간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대동방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천생연분이라 할 독일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다. 발굴 작업을 위해 일 년의 절반 정도를 모래 서걱이는 터키나 이집트의 변방에 가 있고, 새벽이면 모국어로 시를 쓴다. 지인에게 들으니 집 뒤란에 텃밭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수한 씨를 뿌려 상추며 쑥갓 등을 직접 길러 먹는단다. 음식 솜씨 좋기로 유명한 그의 손이 이국에서 김치를 담그고 각종 국을 끓이는 것을 상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슬퍼서가 아니라 먹먹해서. 당신도 잘 견디고 있구나, 싶어서. 그녀가 진주 남강 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그녀는 모래도시와도 퍽 잘 어울린다.
지구 위 어디든 '혼자 가는 먼 집'이니, 참혹한 절망을 통해 어떤 희망을 볼 수 있는지는 킥킥, 온전히 당신 몫이다.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울고 있는 가수〉 부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파이팅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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