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詩 사랑詩

[32] 거미 -김수영

yellowday 2012. 11. 23. 07:18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년>


▲ 일러스트=이상진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해, 지하철 안의 젊은 여자 둘이서 나누는 이런 대화를 들었다. "책을 선물하려는데 어떤 책이 좋을까?", "시집 어때? 아무래도 가을이니까!" 시 읽기 좋은 가을! 올해로 세상을 떠난 지 40주기를 맞는 김수영(1921~1968)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연인의 집 근처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휘파람 불곤 했다는 김수영. 6·25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야전병원장 통역관으로 일할 때 변화 없는 삶이 지겨워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들어 이를 하나씩 뺐다"는 김수영.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 손수건에 싼 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 때문에 부인은 시인이 만취해 돌아온 날이면 주머니에서 틀니부터 찾아내 컵 속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평소처럼 주머니를 뒤졌는데 틀니가 없으면 그의 아내는 전날 그가 다닌 술집들을 시간 순서대로 다닌 끝에 어느 술집 들통에서 틀니를 찾아냈고, 김수영은 그것을 끼워주면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의 현역 시인치고 김수영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는, 김수영의 시를 읽는 사람에 의해 매번 다른 김수영이 되는 김수영. 어느 날 교통사고로 훌쩍 가버린 뜨거운 심장의 김수영이 다시는 가질 수 없었던 그 가을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 시 읽기 좋은 이유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려서'가 아닐까. 지독히 비시적(非詩的)인 산문 문장을 그대로 시로 살려놓고 있는 이 시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치 떨리게 서럽다. '몸이 까맣게 타버려서' 멀리 있는 사람의 가을까지 보인다. '여전히 바라는 것'이 있고, 나의 바람이 '으스러진 설움'이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악착같이 시를 쓰고 사랑하는 것이리라.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가 '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거미'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설움은 가뭇하게 타버리고 가을 찬바람처럼 맑아져 다시 오리라. 모든 사랑을 첫사랑이라 생각하면서, 첫사랑처럼 마지막 사랑에 몸서리치리라. 까맣게 몸을 태우면서.

시 읽기 좋은 가을은 술 마시기도 좋다. 적당히 술에 취해 입 밖으로 낭송할 때 제 맛이 나는 시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도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은 최고다. 퍽 긴 시이니 분위기와 속도감을 천방지축(!)으로 즐기면서 어느 술자리에서 맘 내키는 대로 읽어보시라.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사랑의 변주곡〉 부분) 아, 술 마시고 시 낭송 하고 싶은 가을이다. 시를 읽다가 울어도 용서되는 가을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 김수영이 참말 좋은 것은, 그가 추종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