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23 23:31
길 가다 어느 이발소 문에 '독고노인 무료'라고 써 붙인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시 후에야 '홀로 사는 노인께는 공짜로 이발을 해드리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주인의 뜻은 갸륵했지만 기왕에 쓸 거면 '독거노인'이라고 제대로 쓰고 '獨居'라고 한자까지 덧붙였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어느 대학 영자(英字) 신문이 자기네 주간(主幹) 교수를 'Weekly Professor'라고 쓴 일도 있다. 신문을 일주일에 한 번 내다 보니 신문 발행을 책임지는 교수도 '주간(週刊)'인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풍비박산'을 '풍지박산', '포복절도'를 '포복졸도'라고 쓰는 세상이다. '동고동락'은 '동거동락', '임기응변'은 '임기웅변', '복불복'은 '복걸복'으로 둔갑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현령비현령'을 '이어령비어령'이라고 쓰기도 한다. 모두 이 말들에 쓰인 한자의 원래 발음과 뜻을 몰라서 빚어진 일들이다.

▶지난주 신문기사엔 이런 구절들이 실렸다. '중국 선원들은 정선 명령을 어기고…' '해경은 단정을 타고 중국 어선에 접근해…' '해경은 종선에 탔던 11명과 주선 선장 등을…'. 우리 수역(水域)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을 해경이 단속하다 중국 선원이 사망한 사건을 전하는 기사다. 표기는 옳게 했어도 정선(停船), 단정(短艇), 종선(從船), 주선(主船)을 한글로만 써놓으니 글이 잘 읽히지 않고 덜그덕거린다.
▶한자 교육을 주장해 온 민간단체 어문정책정상화추진위가 그제 국어기본법의 한글 전용 관련 조항들이 위헌(違憲)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이 조항에 따른 교과서 한자 혼용 금지와 한자 과목 폐지가 학생의 학습권부터 부모의 자녀교육권, 저자·출판사의 언론·출판 자유까지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추진위는 "잘못된 정책으로 한국어가 온전한 모습을 잃어 가고 국어 생활과 정신문화가 황폐해지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했다.
▶10년 전쯤 OECD 회원국 국민이 자국어 문서와 산문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측정했더니 한국이 꼴찌로 나타났다. 한자어가 우리말 어휘의 60~70%에 이른다는 걸 무시하고 무리하게 한글 전용 정책을 이어 온 결과다. 한글·한자 혼용론자였던 경제학자 임원택 교수가 오래전 했던 말이 생각난다. "왜 사람들은 한글과 한자를 커피나 홍차처럼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까. 커피와 설탕, 홍차와 설탕의 보완관계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