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09 22:26
- '환월당 진영' - 작자 미 상 , 비단에 채 색, 120.7×70.7㎝, 1881년,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큰스님이 무슨 면목(面目)이 없어서 그랬을까. 물론 아니다. 모든 상(相)이 다 허깨비라서 상(像)을 그리지 않았다. 마침 스님의 법호에도 '허깨비[幻] 같은 달[月]'이 들어 있다.
환월당(1819~1881)은 법명이 '시헌(時憲)'이다. 그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선암사로 출가했다. 3년 동안 문 닫아걸고 법화경만 파고들어 마침내 달통했다는 학승(學僧)이다. 모르는 게 없어 그의 설법은 명료했고, 따르는 후학이 늘 도량에 넘쳐났다.
숨은 그림 찾듯이 배경을 요모조모 뜯어보자. 거기에 환월당의 구도(求道)가 들어 있다. 등용문을 상징하는 잉어 두 마리가 물살을 박차고, 신성한 사슴이 상서로운 영지를 입에 물었다. 오른쪽 필통에 붓과 두루마리가 잔뜩 꽂혀 있는데, 왼쪽 서안 위에는 첩첩이 쌓아올린 법화경이 보인다. 그의 학구적인 이력이 민화(民��)풍의 장식과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다.
그림 왼쪽 맨 위에 환월당을 기리는 글이 있다. 그의 제자인 원기(元奇)가 지었다. 법호에 나오는 '환(幻)' 자를 운율 삼아 쓴 내용이 웅숭깊다. '헛된 몸으로, 헛된 세계에 나타나, 헛된 설법으로, 헛된 중생을 제도했도다.' 헛되고 헛되다니, 무례하게도 제자가 스승을 욕보이자는 뜻인가. 천만에, 산(山)은 산이면서 산이 아니기도 한 것이 선가(禪家)의 어법 아니던가. 헛됨으로 참됨을 가르칠 요량이다.
이 그림은 묻는다. '스님의 모습을 꼭 봐야만 스님을 알겠는가.' 보아야 아는 자는 보여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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