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서포김만중과 남해 노도

yellowday 2012. 6. 15. 16:22


                       남해 노도                                                                ⓒ 경남도민일보

 

이글은 현 서포기념사업회 회장이며,  전 남해리뷰사(월간지) 발행인이며 편집장이셨던
김성철선생의 글입니다.***
어머니의 바다 앵강만을 지키는 서포의 섬 노도


11월 20일, 금산 정상의 단풍은 낙엽이 되어 숲속을 뒹군다.
그러나 부소대 아래 계곡은 아직 붉은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19번 국도를 질주하는 여행객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내일은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에서 사람을 찾아준다는
박수림씨와 함께 태조 이성계의 전설을 찾아나설 예정이라
자주 금산을 바라보게 된다.
벽련과 노도에서도 금산의 전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 서포 김만중 선생은 삼봉산과 봉래산에 못지 않은
영봉이라 금산을 칭송했나 보다.
태양이 하늘의 한가운데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숙일 때쯤
노도로 들어가는 벽련마을 어촌계장의 배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막 생선회를 곁들인 매운탕으로 허기를 메운 터였다.

남해군 관광비디오 촬영차 노도를 방문하는 미래영상의 염양훈 감독 일행.
남해문화사랑회 장상우 부회장, 박영덕 총무 등 일행 8명은
푸른 앵강만의 물살을 가르며 노도로 향했다.
맑은 연꽃. 3천년만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마을
벽련(碧蓮)을 뒤로 한 지 5분도 채 안되어 노도의 선착장에 닻을 내렸다.
열여섯 가구에 43명이 살고 있다는 작은 섬 노도.
남해군에 속한 68개의 작은 섬 중 셋밖에 안되는 유인도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때 배를 저어가는 노를 많이 만들어 노도(櫓島)라고 불리어졌다는
조금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간직한 이 섬은 1985년까지만 해도
등잔불을 켜고 살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외딴 섬이었다.

선착장에는 작은 어선 서너척이 묶여 있지만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포구를 따라 왼쪽으로 돌면 남해청년회의소(JC)에서
1988년 9월에 세운 서포 김만중 선생유허비가 있다.
전체 높이 2,2m, 비문 높이 1m, 너비 1.8m의 유허비 뒷면에는
"창망한 바다 한가운데 한점 신선의 섬 노도는 김만중선생이
숙종 15년(1689)에 위리안치되어 불후의 국문소설 구운몽을
집필하시고 동 18년 56세의 일기로 서거하신 곳이다."
라고 시작되는 비문이 새겨져 노도를 찾는 답사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노도에는 조선후기 정치가로서, 소설가로서,
한시대를 풍미한 대문호 서포 김만중의 발자취가
그의 고뇌어린 일생과 함께 녹아 있다.
유허비를 뒤로 하고 서포 김만중 선생의 흔적을 찾아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개성으로 운구되기 전에 잠시 묻혔던 자리 허묘와
그가 3년동안 유배생활을 주로 보낸 초가터를 찾아가는 길에는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노송이 하늘을 받치고 서 있다.
바다쪽으로는 아름드리 동백이 내년 봄 꽃피울 날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길 옆으로 흐드러진 들꽃이 서포의 혼이 되어 화사하게 웃음짓고 있다.

이제 꼭 309년이 되었다.
허묘와 초가터로 가는 갈림길에 섰다.
서포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갯내음을 품고 불어 온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허묘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앉았다.
장희빈을 사이에 둔 기사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암 송시열을 따랐던 서포의 삶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희빈의 아들은 원자가 될 수 없사옵니다.


숙종은 후궁 장희빈의 소생 균을 원자로 책봉했다.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균의 원자 책봉에 극심한 반대를 했다.
마침내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귀양길에서 죽게 된다.
서포는 강경하게 숙종의 처사를 공박하고 나섰고 결국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장희빈을 둘러싼 일단의 대숙청이 바로 기사사화, 곧 기사년의 환국이다.

김만중은 병자호란의 굴욕을 참지 못해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익겸 공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배 위에서 태어났다 하여 선생(船生)이라는 아명을 가졌던 서포는
1665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등을 거쳐 1671년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그후 동부승지, 예조참의, 공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서포 김만중은 고산 윤선도와는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면서
서인과 남인으로써 정치적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숙종의 첫번째 왕비로서 요절했던 인경왕후(형 김만기의 딸)의
숙부이기도 했던 서포의 가문과 정치활동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남해에서의 문학적 삶과 그의 시대정신이다.
박진규, 이윤수 등의 탄핵으로 남해 노도로 유배된 서포는
'사씨남정기' '윤부인행장' '서포만필' '주자요어' 등 주옥같은 글을 남긴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장희빈(張嬉嬪)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
배소에서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한다.
서포는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이후 잠잠하던 소설문학에
허균(許筠)의 뒤를 이어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소설을 천시하던 당시에 참된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 소설을 씀으로써
허균과 실학파 문학가들 사이의 훌륭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냈고,
이후 고대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서포만필에서는 중국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을 번역 ·해독하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하였다.
특히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평한 문장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한글을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에 비하여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의 시대정신이 얼마나 진보적이며 자주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땀이 식었다.
230여 개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한계단, 두계단 허묘를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섬으로 생각한 장상우 부회장은 '노도가 이렇게 넓었나'를 연발한다.
허묘를 오르는 계단의 중간쯤에서 뒤를 돌아본다.
멀리 금산 상사바위가 태평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내고 있다.
계단의 끝에 평단한 묘자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
저곳이 바로 서포선생의 혼이 잠들어 있는 곳인가보다.


서포의 넋도 저렇게 포승에 묶여 신음하고 있을까?


허묘의 왼쪽에는 그곳이 허묘임을 알리는 입석이 하나 서 있다.
20여 평 남짓한 묘자리는 누가 성묘라도 했는지 잘 정돈되어 있다.
서포의 묘자리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묘 주변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나무든 잡목이든 몇 그루쯤은 바람에 날려와 뿌리를 내릴 법도 한데
그동안 어떤 나무도 자라나지 않는다고 하니 신비스러울밖에...

허묘를 뒤로 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서포가 본격적인 유배생활을 했다는 초옥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둘이서 걷기는 힘든 좁은 길을 따라 서포의 땅으로 향했다.
오른쪽은 언덕이고 왼쪽은 칡넝쿨과 동백나무가 얽힌 계곡이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동백나무들이 칭넝쿨에 감겨 신음하고 있다.

남해 노도에 머문 서포의 넋도 저렇게 포승에 묶여 신음하고 있을까?
영문도 모르는 어린 염소 두 마리가 늦가을의 시든 풀을 맛없게 뜯고 있다.
까만 털코트를 걸친 염소도 목에 굵은 칼을 메고 죄인처럼 호송되는 중이다.
길고 좁은 평지가 나온다. 그곳의 가운데쯤 '西浦金萬重草屋터'라는
돌로 만든 팻말이 덩그라니 빈 터를 지키고 있다.

그곳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

"끝없이 푸르른 바다에 삼신산과 같은 절승선경이 이웃하였으니
비록 숙질제형이 모두 뿔뿔이 낙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건만,
사람들은 마음 그 정도 모르고서 마치 신선놀음하는 듯이 아는구나"

그랬다. 서포의 땅에서 바라본 바다와 금산의 절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부모형제와 떨어져 귀양살이하는 그 마음을 누가 아랴!
혼자 마시기에도 모자랐을 조그마한 샘터는 이미 말라버렸다.
지난 3백여 년을 버려진 땅으로 유폐되었던 노도는 다시 살아 숨쉴 수 있을까?

서포의 넋을 뒤로 하고 노도선착장을 향해 돌아 내려오는 길에
예전에 폐교가 된 노도분교를 들러보았다.
운동장은 낙엽이 무성하다. 우물은 조금 짭짤하지만 깨끗한 물을 쏟아내고 있다.
서포의 터에 옛집이 복원되고 동백나무를 감고 있는 과거의 질곡이 벗겨지는 날
이곳에는 그를 그리워 하는 후손들이 300여년의 세월을 메우고 있지나 않을까?

야속한 태양은 벌써 힘을 다 썼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귀가하고 있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