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스크랩] 유안진 시 모음

yellowday 2012. 3. 3. 05:02
* 내 소망 하나 
생각날 때 전화할 수 있고
짜증날 때 투정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퇴근길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
잠시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 할 수 있고
가슴 한아름 아득한 미소도 받고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거울 한번 덜 봐도 머리 한번 덜 빗어도
화장하지 않은 맹숭맹숭한 얼굴로 만나도
오히려 그게 더 친숙해 져서
이쁘게 함박 웃음을 웃을 수 있고
서로 겉모습 보다는
둥그런 마음이 매력이 있다면서

언제 어디서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은행 가다가 총총히 바쁜 걸음에
가볍게 어깨를 부딪혀서
아! 하고 기분 좋게 반갑게 설레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내 열 마디 종알거림에 묵묵히 끄덕여주고
주제넘은 내 간섭을 시간이 흐른 후에
깨우쳐 주는 넉넉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가끔씩은 저녁 값이 모자라
빈 주머니를 내 보이면서 웃을 줄도 알고
속상했던 일을 곤드레 술에 취해
세상에서 큰소리 칠 줄도 알고
술값도 지불케 하는 가끔은 의외한 면이 있는
낭만스러운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수고스러움을 늘 감사하고
형제들의 사랑을 늘 가슴깊이 새기며
자신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거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 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 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쩜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벅국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

 

* 멀리 있기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져 나는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

 

* 휘파람을 불어다오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 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다오 *

 

*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져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詩)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 그림자를 팔다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웃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 더욱 몰랐지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監視者)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 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 
* 유안진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

 

* 날마다 서산 간다  

나는
올삐미 부헝이 박쥐 호랑이......의 친인척
우리는 서로의 소중한 일부라서
낙조(落潮)를 보러온 구경꾼들 속에
일출을 보러온 내가 있다
졸업이 시작이라는 뜻이 듯이
강물이 끝나는 거기부터 바다이듯이
나의 아침해는 일몰(日沒)에서 떠오른다
나에게는 서해(西海)가 서해(瑞海)이고
서산(瑞山)은 서해보다 더 서쪽에 있다
구경꾼들 의 서쪽보다 더 서쪽인 나는
날마다 서산 간다
서해 간다
일출(日出)보러 간다

 

* 배꼽에 손이 갈 때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유안진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 

 

* 차이, 별거 아니야

남녘에서 불어오면 마파람이 되고, 서쪽에서 불어오면 하늬바람이 되고, 마음에서 불면 신바람이 되는 바람도,

그냥 떠도는 바람일 뿐이고


침과 피와 땀과 눈물 콧물 오줌도, 온 몸을 돌고 도는 몸 속의 물, 다 같은 물일 뿐이야


더구나 물과 불은 쓰고 있는 모자가 다를 뿐이고, 울음과 웃음도 신고 다니는 신발의 차이일 뿐이니,

옷 갈아입듯 바꿀 수 있지


성별 성씨 국적에 얼굴도 바꿔 가면 사는 시대에, 모자나 신발쯤이야 하고, 모자 사러 나가면서 신발만 바꿔 신었는데도,

기분이 한결 달라졌다, 모자든 신발이든 하루에 몇 번씩이나 바꿔가며 살 일이야

 
* 겨울사랑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용서하며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 겨울도 깊어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내 청춘의 가지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은

낡은 거문고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 지는데

애정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없이 밀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것이라 할수있나

  

* 절망에게

검푸른 어둠
그 먹물 속에서
어여 나오기만 혀어봐아
먹향기 진동할 거야
묵란(墨蘭) 한 대궁 솟아 필 거야
눈 오신 이 겨울이
한 장 화선지로 기다리고 있잖냐아

 

* 기왓쪽-신라의 미소

미소가 법어였구나
신라적에
절반너머 깨어져 나간
출토 기왓쪽에
오히려 법어는 완전하고 완벽하다
천년신라를 천 년씩이나 신라이게 했던
법어여
봄볕만치나 다시로우십니다
가을바람같이나 서늘도 하십니다
눈부시지 않게 밝고 맑으십니다
고요로우십니다
아직도 처음같이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워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려 쌓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주는
사람과 얘기 꺼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노라

앞으로 절대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히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의 재산이라고
우리만이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은 못 되어도 일등은 못했어도
출세하지 못했어도
고루고루 갖춰놓고 살지는 못햇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었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유안진(柳岸津)시인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1965년 현대문학 [달][위로][별]-등단, 1996년 96펜문학상,1998년 정지용문학상,2000년 월탄문학상 수상

-시집 [다보탑을 줍다][멀리있기][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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