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류시화 시 모음 40편

yellowday 2020. 11. 15. 10:46

 

류시화시모음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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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까지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 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2》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버릴 수 있다면 / 류시화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3》
가을 유서

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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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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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대와 함께 있으면

류시화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행복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내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그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느땐 아무말 하지 않아도
마치 내 마음을 털어 놓은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항상 나를 이해하는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편안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사소한 일 조차 속일 필요없고
잘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세상을 두려워 하지않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대에게 의지하면서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대는 내게 특별한
자신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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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런 뒤에야

류시화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에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았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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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운이 그리워

류시화

그리운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입구를 빠져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짖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온 동백꽃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이 그리워
문득 타 보는 완행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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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만의 것

류시화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깨죽지에서 피어오르고,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는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 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러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강 아래쪽의 풍경과
한 낮의 수증기,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 두시간 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강 아래쪽으로 떠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got빛을 피해 얼굴을 물 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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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토록 많은 비가

류시화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 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 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 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 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 위의 낯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 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환 폭의 환상임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 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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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길가는 자의 노래

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 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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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이

류시화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것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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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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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누군가 따뜻한 시선이 그리운 날

류시화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자유를 원했으나 그 끝에 이르러
이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세상 어느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삶에 있어서
나를 지탱해 온 힘은
언제나 항상 늘 나를
따뜻하게 내다보아 주는
누군가의 시선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언제나 늘 나는
따뜻하게 바라보아 주는
군가의 시선이었음을
이것이 나를 수행해서 건져준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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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눈 위에 쓰는 겨울 시 /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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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목련

류시화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 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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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물안개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 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 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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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민들레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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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바람 부는 날의 꿈

류시화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엑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 가를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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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람 부는 날의 풀

류시화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 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
《20》
붉은 잎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 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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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류시화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을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
《22》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

류시화

사막은 얼마나 생각할 것이 많으면 그렇게
한 생애를 길게 잡았을까

소금은 얼마나 인생의 짠맛을 보았으면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을까

얼음은 얼마나 고뇌에 차면 그렇게
마음은 차갑게 닫고 있을까

우물은 얼마나 후뢰가 깊으면 그렇게
마음 깊이 눈물을 감추고 있을까

심해어는 또 얼마나 마음을 강하게 먹었으면 그렇게
심해의 압력과 어둠을 견디고 있을까

별은 또 얼마나 말못할 과거가 많으면 그렇게
먼 곳까지 달아나 있을까
☆★☆★☆★☆★☆★☆★☆★☆★☆★☆★☆★☆★
《23》


류시화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꿈 속의 꿈 그리고 그 안의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
《24》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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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소금(salt)

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
《26》
소금별

류시화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
《27》
소금인형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28》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류시화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서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
《29》
시월의 시

류시화

그리고는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 영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
《30》
여섯줄의 시

류시화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
《3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32》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류시화

강변을 거닐어도 좋고 돌담길을 걸어도 좋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어도 좋았습니다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레스토랑에 앉아 있어도 좋고
카페에 들어가도 좋고 스카이 라운지에 있어도 좋았습니다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이 세상이 온통 우리를 위하여
축제라도 열어 놓은 듯했습니다

하늘에 폭죽을 쏘아 놓은 듯 별빛이 가득하고
거리에 네온사인은 모두
우리들을 위한 사랑의 사인 같았습니다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서로 무슨 말을 해도 웃고 또 웃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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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인생을 다시 산다면

류시화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번 인생보다 더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자주 구경하리라.
산에도 더욱 자주 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많이 하리라.
아이스크림은 많이 먹되 콩 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을 것이나
상상 속의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 시간을, 하루 하루를
의미 있고 분별 있게 살아온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아, 나는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나의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지리라.
사실은 그러한 순간들 외에는 다른 의미없는
시간들을 갖지 않도록 애쓰리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이 순간만을 맞으면서 살아가리라.

나는 지금까지 체온계와 보온물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는 그런 무리 중의 하나였다.
이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길에 나서리라.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초봄부터 신발을 벗어 던지고
늦가을까지 맨발로 지내리라.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데이지 꽃도 많이 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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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잊었는가 우리가

류시화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뒤에서 한숨 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 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 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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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저녁의 꽃들에게

류시화

연필이 없다면 난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시를 쓰리라

내게서 손가락이 사라진다면
입술로
바람에게 시를 쓰리라

입술마저 내게서 가버린다면 난
내 혼으로
허공에다 시를 쓰리라

내 혼이 어느 날 떠나간다면
아, 그런 일은 없으리라
난 아직 살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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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저편 언덕

류시화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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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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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짠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류시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 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뒤에 서면 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 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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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첫사랑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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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헤어지는 지금

류시화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한 사람을 떠나보냅니다

비록 우리 사랑이 녹아내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해도
그래도 한때 행복했던 그 기억만은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이 사랑
그대가 주었던 슬픔은 모두 잊고
추억의 상자에서 꺼내어
아름다웠노라, 지극히도 아름다웠노라
회상할 수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우리 사랑이 이별로 남게 되어
지금은 견디기 힘든 아픔뿐일지라도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헤어지는 지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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