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으면
이야기는 마음껏 해줄 수 있지만, 책은 읽어줄 수 없는 할머니에게 손주는 눈치 없게 자꾸만 동화책을 들고 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손주지만, 할머니는 그래서 더욱 당신의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영글어가는 홍시처럼, 몰랑몰랑한 손주놈 몸을 가슴에 폭닥하게 품고 싶지만, 손주 손에 들린 동화책, 알 수 없는 딱딱한 기호들이 무서워 할머니는 숨어버립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귀여운’ 시이지만, 한 인간이 지키고 싶은 자존심의 실체가 보입니다.
문득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가 생각납니다. <더 리더>라는 영화로도 나왔지요. 초반엔 소년과 연상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이 그려집니다. 어쩐 일인지 여인은 항상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이 영화의 가슴 아픈 클라이맥스는 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이 나치 전범 재판에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까지 뒤집어쓰는 대목입니다. 감형이 되려면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지만, 그녀는 수치를 겪는 대신 무기 징역을 택하고 맙니다. 타인에게는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당사자에게는 드러내느니 딱 죽고 싶은 자기만의 아킬레스건이 있지요.
강춘자 할머니의 시 「무서운 손자」를 읽으면서, 자존을 지키고 싶어 하는 한 여인의 ‘무서운 힘’을 느낍니다.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헌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상대에게만큼은 자신의 존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처절한 욕망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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