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호북성 산해관 시에 가면 맹강녀 사당(孟姜女廟)이 있다. 맹강녀 사당은 조선시대 베이징에 들어가는
조선 외교관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들린 명승 기념지였다.
이곳에 들린 조선 사신들은 명승과 유적들을 감상한 후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맹강녀 사당은 진나라 시대 만리장성 축성을 위해 진시황의 강제징발을 당해 산해관 지역에까지 끌려 온 남편 판치량(范杞良)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남편이 공사 중 죽은 것을 알고 애통하게 그리워하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맹강녀의 사랑과 정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맹강녀의 남편에 대한 정절과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중국의 4대 민간 전설(견우직녀, 양산박, 백사전, 맹강녀 전설) 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맹강녀 전설」(孟姜女哭长城传说)은 전설이기 때문에 내용이 지역마다 다르고, 버전(version)마다 이야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이곳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들의 기록 또한 내용이 중국 본래의 전설 내용과도 많이 다르다. 듣는 사람마다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편에 대한 맹강녀의 지극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정절을 핵심으로 한다. 맹강녀 사당에 기록된 전설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맹강녀는 강남 지방 한 부유한 상인인 허씨(許氏) 집안의 무남독녀 딸이었다. 이름은 맹강이었다. 그녀는 미모가 뛰어났고 현숙하였다. 어럽게 늦게 딸을 얻은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금지옥엽처럼 키웠다. 당시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50만 명의 장정들을 전국에서 징발하여 만리장성을 쌓고 있을 때였다. 진시황은 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필요한 인력 동원을 위해 사지가 멀쩡한 남자들은 거의 모조리 부역에 징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맹강녀의 집에 한 청년이 잠입해 들어왔다. 이름이 판치량이라고 하는 청년인데 진시황의 부역동원을 피하기 위해 쫓겨 다니다가 관헌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몰래 그녀의 집으로 숨어 들어온 것이다. 판치량은 국가의 부역 동원을 피해 도망다녔기 때문에 공안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시내 도처에는 판치량의 몽타쥬가 걸려 있었고,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관헌들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비록 숨어들어온 불법 가택 침입자였지만, 판치량을 본 맹강녀는 한 눈에 반했고 그녀의 부모도 판치량을 좋아 했다. 판치량이 맹강녀의 집에서 몇 일을 유하는 동안 둘은 사랑에 빠졌고, 드디어 혼례를 올려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진시황의 가혹한 정치가 결국 그들을 갈라 놓았다.
공안은 판치량을 찾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녔다. 결국 판치량은 공안에 체포되었고 그는 호북성 산해관 근처의 만리장성 축성 작업장으로 끌려갔다. 두 부부의 신혼생활은 3일만에 끝났다. 판치량은 장군 몽염(蒙恬)이 관할하는 공사 현장에 배속되었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무거운 돌을 나르고, 회를 바르고 하는 고된 축성 작업 중에 그는 사고를 당해 죽었다. 성벽에 깔려 죽은 것이다. 작업장 인부들은 그가 죽은 후 제대로 장사도 지내지 않고 성벽 밑에다 그냥 묻어 버렸다. 가족에 대한 부고 통지도 물론 없었다.
국가에 의해 끌려간 남편으로부터 행여 소식이 올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맹강녀는 남편으로부터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가도 남편으로부터 소식 하나 없었다. 주변에 소식을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맹강녀는 직접 남편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주변에 길을 묻고 행인들에게 길을 물으면서 이곳 산해관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오는 도중에 산적에 잡혀 가지고 있던 재물과 옷가지를 모두 빼았겼으나, 맹강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도적들은 그를 풀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일한 곳으로 추정되는 작업 현장에 직접 찾아가 보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만리장성 작업현장이 잘 보이는 이곳 높은 곳에 올라 매일매일 만리장성을 쳐다보면서 남편을 찾았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그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망대에 올라 남편을 찾았으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녀에게 남편이 작업을 하다가 성벽에 깔려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너무나 큰 슬픔에 그녀는 7일 밤낮으로 매일매일 슬프게 울었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하였다. 어느 날 성벽 앞에서 슬프게 울자 갑자기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 아래에 깔려 있던 시신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러나 어느 것이 남편의 시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시신 위에다 흘렸다. 그러면서 ”하느님, 하느님! 만일 저의 남편 시신이라면 이 피가 흘러들게 하여 주시고 아니라면 흘러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였다. 드러난 시신마다 손가락의 피를 흘렸으나 피가 흘러 내려갔다. 마침내 어느 시신에다 대고 손가락의 피를 흘리자 피가 그대로 스며들었다. 남편의 시신을 찾은 맹강녀는 몇 날 몇 일을 울며 통곡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진시황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맹강녀를 본 진시황은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비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남편의 장사를 지내고, 49제를 지내고, 산천을 유람하고 마음을 정리한 다음 3일 후에 첩이 되겠노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것이 끝나자 진시황은 그녀를 데려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어찌 당신의 비가 되겠느냐며 바다에 투신하였다. 맹강녀가 죽은 다음에 그 자리에 하나의 돌이 불쑥 솟아 올랐다. 이것이 맹강녀의 망부석(望夫石)이라고 부른다. 망부석은 멀리 동쪽의 서해를 바라보고 있다.
맹강녀의 사당이 위치한 곳은 자연경치가 뛰어나다. 경치가 빼어나서 그런지 청나라 시대에는 이곳에다 황제의 심양 방문 여정시 중간에 휴식을 위한 전용 별장인 행궁을 만들어 놓았다.
1780년 사신단의 일행으로 박지원과 함께 베이징에 가는 길에 7.23일 비오는 날 이곳을 방문한 노이점(盧以漸)은 그의 「수사록」(隨槎錄)에서 이 곳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시적인 오류로 인하여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원본 이미지가 삭제되어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뷰어 내 로딩이 불가능한 큰 사이즈의 이미지입니다.
”이 망부석은 천고의 기이한 유적일 뿐만 아니라 이 산도 경치가 매우 기이하고 빼어나다. 북쪽으로는 의무려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마주 대하며 서쪽으로는 각산(角山)을 굽어보고,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이어져서 시야가 확 트이며 지형이 빼어나고 뛰어나다. 실로 산해관(山海關) 밖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다. 잠시 배회하니 차마 작별하고 돌아올 수가 없다.“(김동석 역, 수사록(2015),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p.184.
맹강녀 사당은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지척에 있다. 조선시대 외교관들은 여기를 보고 다음 번에 군사 전망대인 장대(將臺)를 본 다음 해거름에 산해관으로 들어갔다. 맹강녀 사당을 방문한 조선 외교관들은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접했다. 그러나 성리학적 유교 기반을 가진 이들은 맹강녀의 ”사랑 이야기“ 그 자체를 상세히 남기진 않았다. 대신 맹강녀 사당의 유래나 망부석의 이야기, 사당 주변의 경치, 사당 내의 현판의 저자나 돌에 새겨진 시의 내용 등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당시 사대부들인 외교관들이 베이징 가는 길에 이곳을 반드시 보고 갔다는 것은 유교의 성리학적 배경 하에서 정절을 지킨 대표적인 열녀의 한 사람인 맹강녀의 고사를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맹강녀 사당 방문을 통해 끝까지 정절을 지킨 열녀의 모델을 조선에도 널리 보급시키고, 이를 통해 유교적인 가정질서를 수호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맹강녀의 고사는 ”충신은 두 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인 정치, 사회, 가족질서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맹강녀 사당은 중국에서 유일한 국가급 사당이다. 현재 사당은 맹강녀 전설에 따라 내부 시설이 잘 꾸며져 있다. 맹강녀 사당으로 올라가는 108개의 돌계단, 맹강녀를 모신 사당, 사당 내에 청 건륭제가 남긴 친필 현판(芳流遼海), 사람의 형상을 한 망부석, 그리고 맹강녀 정원과 함께 청 건륭제가 남긴 시 등이 볼만하다.
당시 필자가 맹강녀 사당을 방문할 때에도 노이점, 박지원이 여기를 방문할 때처럼 비가 내렸다. 노이점이 방문할 때에도 비가 내리다 다시 날씨가 개인 것처럼 내가 방문할 때에도 한 바탕 억센 소나기가 내리다가 이내 곧 개였다.
이 지역에는 여름에 복숭아가 많이 난다. 이 지역을 지나다 보면 길 가 좌우에 많은 복숭아 밭이 보이고 노변 중간중간에 복숭아를 파는 농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길가에서 파는 탐스러운 복숭아를 하나 사서 장대비가 내리는 처마 밑에서 비에 씻어서 먹은 복숭아 맛은 일품이었다. 노이점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곳 주변에는 미모가 뛰어난 미인들도 많이 보였다고 한다.
혹시 여름에 산해관에 가시는 분들이 계시면 각산장성(角山長城)과 함께 이 곳 맹강녀 사당을 같이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한다. 산해관 역에서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References
노이점 저, 김동석 역, 수사록(隨槎錄), 성균관대 출판부(2015)
박지원 저, 고미숙 외 역, 열하일기, 그린비(2010)
서인범 저, 연행사의 길을 가다, 한길사(2014)
출처 : 필자의 Facebook(2018.8.4)
'쉬어가는 亭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차, 뒤에 거울이...바지 안 입고 인터뷰하다 딱 걸린 시장님 (0) | 2021.01.05 |
---|---|
우한 폐렴과 박쥐[횡설수설/구자룡] (0) | 2020.04.13 |
그림 속 가로 막대가 정확히 '수평'이라고? (0) | 2018.08.04 |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0) | 2018.03.21 |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우러나온다. ‘한국의 미인’ 합성 사진을 보고 느낀 단상 (0) | 2018.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