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준 작가는 ‘라포르 서커스’라는 가상의 서커스단 이야기로 11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줄타기에 대한 관심이 서커스단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는 개인전과 함께 《라포르 서커스》라는 같은 이름의 장편소설도 발표했다. 《라포르 서커스》에는 줄타기를 하는 쌍둥이 형제 라포와 라푸, 단검 던지기 묘기를 벌이는 아이카,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한 인형 엘카드몬을 만든 인형술사 아트만, 마술사 엘린과 동물조련사 엘레나 등이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읽을 수 있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커스단의 모습이 펼쳐진다.
박민준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면 우선 놀라운 기교에 깜짝 놀라게 된다. 미묘한 표정까지 포착해내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 때문에 실제 눈앞에 있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코끼리와 호랑이의 몸은 하얗게 탈색된 후 색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고, 침팬지가 왕관을 쓰고 마차에 앉아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동물이나 탈의 표정도 너무 풍부하고 생생해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을 조금 크거나 작게 그려 어긋난 비례로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장면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과 비슷하다. 작가는 “실제 장면을 묘사한 것 같은 그림에 이질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면 긴장감과 흥미가 유발됩니다. 사실과 너무 동떨어지면 그런 느낌이 줄어들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산하고 여러 번 수정해서 그렸죠”라고 설명한다.
그림 속 이야기, 소설로
Parade for Rapo(라포를 위한 행진) _ Oil on canvas, 210x294cm, 2016-2017 |
쌍둥이 형제 라포와 라푸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태어난 후 태풍과 홍수, 가뭄 등 자연의 혹독한 시련이 이어지면서 마을이 황폐해진다. 어머니가 영양부족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도 눈보라 치는 밤거리에서 쌍둥이 형제를 품에 안은 채 숨을 거둔다.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 품 안에서 살아남은 형제를 서커스단 단장이 발견하고 데려와 키운다. 형 라포는 서커스단 최고의 줄타기 곡예사가 되고, 동생 라푸는 형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관중의 갈채를 받던 라포가 줄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라푸가 형 대신 줄 위에 선다.
어린 시절 유랑 서커스단의 칼 던지기 묘기를 보고 매료된 아이카.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연습을 거듭하던 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허수아비 대신 표적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아슬아슬하게 친구의 몸을 피해 단검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자만심의 대가는 참혹했다. 단검은 친구의 가슴을 찔렀고, 아이카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고통과 직면하기 위해 서커스단에서 단검 던지기를 하고, 정신을 더욱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벼린다. 아트만이 최고의 인형을 만들려고 정성을 다할 때 그의 생명 조각이 조금씩 인형에 섞여 들어간다.
소설 《라포르 서커스》의 등장인물을 보면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갈아 넣는 예술가의 초상이 떠오른다. 그것만이 비극적인 운명과 죽음을 극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처럼 보인다. 소설 속 아트만은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 세상에 아직 순수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고 인간의 원형과도 같은 순백색의 인형 ‘엘카드몬’을 만든다.
Panteon(Pantheon·판테온) _ Oil on canvas, 210x291cm, 2016-2017 |
르네상스 시대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또 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을 차용한 〈죽음의 탄생〉이다. 〈죽음의 탄생〉에 등장하는 비너스는 창백한 얼굴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켄타우로스처럼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인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비너스에게 해골을 보여주면서 죽음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밀하고 매끈한 붓질과 균형 잡힌 구도, 치밀한 묘사, 온갖 은유로 가득한 그림. 박민준 작가는 현대미술이 등장하기 이전 서양 고전회화의 전통을 되살린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새롭다. 자신만의 이야기, 은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홍익대 회화과에 다니던 시절, 그는 주관을 배제하고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하이퍼리얼리즘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학생들이 추상화를 그릴 때 사실주의 회화를 고집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카라바조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도마가 부활한 예수의 못 자국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하는 장면으로, 성경 속 내용을 실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그 작품을 보자 그때까지 자신이 그려왔던 그림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고 한다. ‘이런 감동을 주는 그림 한 점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Statue of Rapu(라푸의 상) _ Urethane resin, gold leaf, colored wood, 260x31x34cm, 2018 |
“세 차례 개인전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인정받는다고 느꼈지만, 동양인으로서 서양 회화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따라한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도제식 교육을 받을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더라고요. 비슷한 교육을 하는 곳을 찾아 일본으로 갔죠.”
일본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건너갔다.
“2015년까지 7년 동안 뉴욕에서 지냈습니다. 수많은 작가가 모여 있는 그곳에서 제 위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죠. 나를 찾아 방황하다 방향을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죠.”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라포르 서커스’ 작업에 몰두했다. 가로세로 2m가 넘는 큰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반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는 은유부터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은유까지 여러 층위의 은유가 담겨있다. 알쏭달쏭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자꾸 작품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고, 일일이 대답해주기 피곤해진 그는 소설로 써서 보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동화나 단편으로 쓰려고 했지만, 쓰다 보니 점점 길어졌다고 한다.
삶과 죽음, 영원을 뻔하지 않게
Rapu-Missing Bluebird(라푸-파랑새를 잃어버린 광대) _ Oil on canvas, 45x35cm, 2018 |
“‘이건 내가 아니라 라푸가 그리는 그림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부담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붓질을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를 품에 안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릴 때는 울컥했습니다. 내가 만든 이야기에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다니,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서 지금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제 작품도 달라질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 영원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해온 작가는 소설에서 아트만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예술관을 펼친다. 순수한 예술적 열망이 낳은 완전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존재를 만들고 싶었던 아트만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그림 한 장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죠”라고 덧붙인다.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