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6-01-15 13:40 | 수정일 : 2016-01-15 14:12
⊙ 서울 종로 아흔아홉 칸 도련님에서 빈털터리 폐결핵 환자로 전락
⊙ 명창 朴綠珠에 일방적으로 구애했다 실패… 정신적 육체적 비극이 創作의 불씨
⊙ “병든 김유정, 연안김씨 여인과 결혼했으나 첫날밤 없이 破婚”
⊙ 다섯째 누이 집인 경기 하남 산곡에서 사망… 생질 후손 중에 도예가, 시인 나와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숨진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 1937)은 1930년대 한국문단에 독특한 작가였다.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박태원 등이 참여한 문학동인 구인회(九人會)의 후기(後期) 동인으로 참여하며 인상 깊은 작품을 남겼다. 모더니즘에 바탕 둔 구인회 작가들과 달리 토속적인 한국인, 가난하고 무력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해학을 담은 작품이 다수였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백꽃〉 〈봄봄〉 〈만무방〉 〈금(金)따는 콩밭〉과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소낙비〉, 같은 해 《중앙일보》 당선작인 〈노다지〉 등이 있다.
집안의 몰락과 실연(失戀)을 겪은 김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괴로워했으나 생의 마지막 안간힘으로 소설을 썼다.
정신적 육체적 비극이 오히려 창작의 불씨가 됐다고 할까. 서울 변두리 셋방과 경기도 하남(당시의 행정구역은 광주군 중부면
100번지)의 다섯째 누이 집을 오가며 소설에 매달렸다.
김유정은 죽기 직전 친구 안회남(安懷南)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시 치질과 결핵으로 사경을 헤맬 때다.
〈…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중략)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네가 보던 책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이 편지는 1937년 3월 18일 부쳐졌으나 11일 뒤 경기 하남의 누이 집에서 병사하고 만다. 사인은 폐결핵. 김유정의 조카 김영수(金永壽·1914~2002)가 삼촌의 시신을 화장해 한강에다 뿌렸다고 한다.
2남6녀의 일곱째인 김유정은 맏형 유근(金裕近·1893~?)의 아들 영수와 무척 가까웠다. 여섯 살 아래인 조카 영수는 삼촌을 “마치 신(神)처럼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김유정의 고향이자 생가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에서 함께 야학을 하기도 했다. 생전 조카는 김유정을 “슬프고 괴로웠을망정 누구보다 깨끗한 생애를 살다 갔다”고 평했다. 무엇이 김유정을 슬프고 괴롭게 했을까.
기자는 김유정의 생가가 있는 강원도 춘천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조카 김영수의 아들 진웅(金辰雄·76)씨를 만났다. 요절한 김유정은 아내도 자식도 없다. 진웅씨는 작은할아버지인 김유정을 기억하며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흔아홉 칸 부잣집 8남매 중 일곱째 도련님
23살 무렵의 김유정(왼쪽). 가운데가 둘째 누나 김유형, 오른쪽이 조카 김영수. |
김유정은 춘천의 부잣집 둘째아들이자 2남6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출생지가 서울이냐 춘천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서울(종로구 운니동. 속칭 진골)과 춘천(신동면 증리 417번지)을 오가며 유년을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김진웅씨의 말이다.
“아버지(김영수)의 회고에 따르면, 작은할아버지 김유정은 춘천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물론 서울에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집이 있으니 춘천과 서울, 두 패로 왕래하며 지냈을 거라고 생각돼요. 아버지와 고모(金珍壽·1920~2013) 모두 춘천에서 나셨어요. 집안은 소위 천석집안의 지주였어요. 제 할아버지(김유근) 다음으로 딸을 연거푸 다섯을 낳은 뒤에 태어난 유정 어른을 온 집안 식구들이 애지중지 키웠다고 합니다.
운니동에서 살다가 관철동,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도 사셨는데, 유정 어른이 살던 숭인동 집 동편은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저택인 ‘상춘원’이었고, 남서편은 박영효(朴泳孝)의 저택이었다고 해요. 이 세 집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는데 모두 아흔아홉 칸이라더군요.”
김유정이 주소를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은 그의 부모가 일찍 사망한 뒤 유산을 물려받은 형 유근이 주색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정의 나이 일곱 살 때 어머니 청송심씨, 아홉 살 때 아버지 김춘식(金春植·1873~1916)이 각각 사망했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방탕했던 형 유근은 이후 대놓고 난봉을 피웠다고 한다. 조실부모의 상실감과 형의 음주벽이 김유정의 성격을 내성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김진웅씨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그 많은 재산을 다 술로 탕진했다고 하는데, 전부는 아닙니다. 당시 일제가 재산을 뜯어먹고, 독립군 쪽에서도 손을 내밀던 시절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양쪽으로 고통을 당하셨다고 해요. 또, 몰래 독립군 자금을 대려면 흥청망청 돈쓰는 시늉을 해야 일제가 의심을 안 했을 것 아닙니까. 물론 할아버지의 당시 행적을 실증할 순 없지만 우리 문중(靑風金氏)에서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형의 낭비로 집을 서울 숭인동에서 관훈동, 청진동으로 옮기더니 살림도 아흔아홉 칸 집에서 삼십 칸으로 줄어들었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유정의 형은 1928년 춘천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유정과 조카 영수는 삼촌 김정식(金正植)의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김영수)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주야로 음주하는 가운데서 취담일지언정 ‘우리 유정이~’ 하면서 조실부모한 그를 측은히 여겼다고 합니다. 어리나 점잖고 재주 있는 것을 자랑했고요. 아무리 가족을 들볶아도 그분만은 털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생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동생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동기구나 책, 옷, 영화표를 사 주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대요.”
형 김유근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
휘문고보 2학년 무렵의 김유정. |
김유정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휘문고보 동창이던 안회남은 중편소설 〈겸허-김유정전(傳)〉을 통해 실명(實名)으로 유정의 형을 파락호(破落戶)라 묘사한다.
〈… 그(김유근)의 집에는 유정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여인네가 수없이 많은 것 같아, 나는 그의 형수인 ‘정말 아주머니’를 알아내기까지 사실 오래 걸렸다. (중략) 경향 각지의 딴 곳에도 첩이 있었는지 그것은 내 알지 못했고, 또 알아 무삼하리오 마는, 하여간 이 한 집안에도 그 외 백씨의 요샛말로 제이부인 제삼부인이 득실득실했었다. 한때는 돈을 끼얹다시피 하고, 취하여 십 원짜리 따위로 코를 풀어 버리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섰던 기생들이 집어넣고, 집어넣고 했다는 소문까지 있는데… (이하 생략)〉(《文章》, 1939년 11월호)
안회남은 개화기 지식인이자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安國善)의 외아들이다. 안회남도 소설을 썼는데, 김유정보다 앞선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이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안회남의 소설 속 김유근의 모습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관찰자 입장에서 형과 동생을 상당히 대조적인 인물로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유근의 친손자인 진웅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선 현종(顯宗)의 장인 청풍부원군의 후손이 되다 보니 재산을 많이 하사받아 부자가 됐는데 그 시절엔, 있는 집에서 첩 두셋 두는 걸, 흉으로 안 봤잖아요. 작은할머니가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자기가 큰마님 노릇을 하다 보니, 싸움이 나서….”
곁에 있던 진웅씨의 아내인 손기순(孫基順·71)씨의 말이다.
“시할아버님이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근처의 개운사도 지어 기증했고 옛날엔 그분 이름이 절 문설주에 새겨져 있었는데 6·25 때 총탄에 ‘유’ 자가 지워졌다고 합니다. 안회남이 집안 사정을 잘 모르고 썼을 겁니다. 가끔 집에 오다가다 봤던 것이지 실제 집안내용은 모르는 것이죠.”
곁에 있던 진웅씨는 “소설을 소설로만 봐야 하는데, 그걸 진실로 바라보니 안타깝다. 다 지난 일을 이제 와 밝힐 수도 없고… 문중에서도 얘기가 있지만…”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김유근은 이후 어떻게 됐나요.
“제가 어렸을 때 군속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강릉에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한번 찾아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집안이 망한 뒤 할아버지는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시다가 6·25 사변 때 소식이 끊겼어요. 제가 1980년대에 사망신고를 했고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작은할아버지(김유정)가 안 태어나신 게 본인에겐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상속을 많이 받았는데, 왜 할아버지는 동생 몫으로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 시절엔 장남에게 (재산을) 다 줬었잖아요.”
김유정의 누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정보다 나이가 많은 5명의 누이들은 요절하거나 불행한 삶을 산 이가 많다고 전한다. 시집갈 당시 돈을 요구하는 사돈들 때문에 각각 연수(年收) 300석씩 나누어 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집안 관계자의 말이다.
“유정의 첫째 누이(김유달)는 김치에 깨소금을 넣었다고 하여 시집에서 쫓겨나 일찍 사망했다고 합니다. 둘째 누이(김유형)는 아이를 못 낳아 소박을 맞고, 혼자 피복 공장에 다녔는데 서울 동작동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정인이 생겼는데 그 정인이 처가의 돈을 탐냈다고 해요. 넷째 누이(김유관)는 정승댁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재산을 떼어 오라’는 시모(媤母)의 구박을 받다가 병들어 친정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오빠 김유근이 병든 넷째 동생이 불쌍하다고 등에 업고 마당가를 서성였다고 해요. 다섯째 누이(김유흥)는 시골(경기 하남)로 시집가서 고생을 한다고 하여 김유근이 아파했다고 합니다.
인물이 좋고 똑똑했던 유정의 누이동생은 숙명학교 재학 중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자, 남학생들이 편지를 보내고 집까지 따라다녀 김유근이 꾸중을 했더니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후 강제로 머리를 깎여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나중 수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박녹주에 일방적 구애
강원도 춘천 김유정문학촌 한쪽에 있는 명창 박녹주의 젊은시절 모습. 김유정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구애했으나 사랑이 이뤄지진 못했다. |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가을 어느 날, 김유정에게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다. 김진웅씨는 부친의 회고를 들려주었다.
김유정이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간통집’으로 막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때 저쪽에서 여탕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스물대여섯 되어 보였던 그 여인은 상기된 얼굴에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틀어 올리고 있었다. 유정은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목간통집’ 근처를 서성대다 그녀를 발견하고 뒤를 밟았다. 그녀가 바로 기생 박녹주(朴綠珠·1905~1976)다. 박녹주는 동편제 ‘흥보가’의 인간문화재. 열두 살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판소리의 기본을 배운 뒤 1926년 11월 10일 일동축음기주식회사가 조선극장에서 개최한 명창대회를 시작으로 1969년 10월 15일 명동국립극장에서의 은퇴 공연까지 수많은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한 인물이다(참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진웅씨의 말이다.
“아버지의 회고에 따르면, 유정 어른의 구애는 일방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유정 어른도 자신의 문장이 아름다워진 것은 이때(실연)의 영향이었다고 가끔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정 어른의 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술을 마셔야 했고, 가만히 그냥 있을 수 없어 술을 더 먹어야 했다는 겁니다.”
박녹주에 대한 사랑과 실연이 술을 탐닉하게 만들었고 결국 폐결핵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진웅씨의 아내 손씨의 말이다.
“언젠가 청풍김씨 문중에서 영혼 혼례식을 올려 두 분 사이에 연을 맺으려 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반대했어요. 그 분(박녹주)은 결혼해서 자식과 남편이 있는데 유정 어른과 맺어질 수 있나요? 기분이 상하더라고요. 박녹주는 결혼을 두세 번 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총각하고 과부하고….
그때 좀 유정 어른에게 따뜻하게 대했더라면 더 오래 사셨을지 모르잖아요.”
—더 사셨을지는 몰라도 김유정 선생은 더 이상 소설을 못 썼을 겁니다.
“맞아요. 그럼 문학이 안 됐을 거예요. 따뜻하게 받아 줬더라면 유정 어른이 방탕하지도, 일찍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씀 듣고 보니, 문학이 안 됐을 수도 있었겠네요.”
곁에 있던 진웅씨가 말했다.
“야멸차게 잘 보내셨어요. (사귀셨다면) 이 글도 안 나왔을 겁니다.”
연안김씨 여인과의 결혼설
김유정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 신동면 증리, 속칭 실레마을의 1960년대 정경. 멀리 보이는 산이 금병산이다. 김유정은 훗날 실레마을에서 야학당을 열었는데 나중 금병의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요절한 김유정은 결혼도, 자식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스물아홉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집안이 몰락하기 전까지 천석 갑부였음을 감안하면, 사방에서 사윗감으로 탐을 냈을 것이다.
한국 신문삽화(揷畫)의 선구자이자 《조선일보》 학예부장 출신의 안석주(安碩柱) 선생은 김유정을 일컬어 ‘문인 중에 제일의 미남자였고 나중에는 폐가했을망정, 그래도 명문이요 거부의 대갓집 도련님이었으며, 후에는 문명(文名)을 날린 재인이기도 한데, 무슨 때문에 일생을 통해 그의 연애가 그렇게 비참하게만 마쳤는지 모를 일’이라고 썼다.
손씨의 말이다.
“집안끼리 얘기해서, 유정 어른과 연안김씨 집안의 한 여성이 혼인을 맺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 여성 집안과 가까운 분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정식 혼례인지는 모르나 유정 어른이 첫날밤도 안 보내고 여성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해 오는 얘기로는 ‘내 몸이 병들고 능력이 없는데, 남의 처녀를 망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당시도 몸이 안 좋으셨나 봅니다.
1960년대 찍은 김유정의 생가터. |
—연안김씨 그 여성은 훗날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그분도 흠이 생긴 거잖아요. 정식 혼례든 아니든, 한번 소박 받은 여성이 시집가기 쉬웠겠어요? 그러니 그쪽 집안이 청풍김씨 집안을 아주 안 좋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유정 어른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기 싫으셨던 겁니다.”
안회남의 〈겸허〉에는 이런 문장도 들어 있다.
〈… 유정이 총각으로만 있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가 결혼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나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가 작고한 후에야 영수 군에게서 들어 알았다. 그러면 어째서 유정이 나에게까지 그것을 감추었는지 내가 결혼한 날의 유정 일기를 보면, 그는 나를 퍽 행복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한 후, 자기는 도저히 그런 행복을 꿈꿀 수 없다고 하고,
‘나는 영원히 결혼하지 않으리라. 나는 문학과 함께 살련다. 그것이 나의 애인이요, 아내다.’
이러한 의미의 것을 적어 놓았는데 한 여자와 연애 없이 결혼한 것을 그는 부끄러이 생각하여 나에게 알리지 않았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文章》 1939년 11월호)
유정과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은 유정이 죽자 그의 유고와 연애편지, 일기, 사진, 책들을 모두 맡아서 보관했다고 한다. 심지어 유정이 지니고 다녔던 청송심씨 어머니와 명창 박녹주의 사진까지. 그러나 안회남이 월북하면서 유정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김진웅씨의 말이다.
“아버지(김영수)가 작은할아버지의 유품을 보따리로 가득 싸서 안회남 선생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안 선생이 소설을 쓰는 분이니 그분을 통해 유작이 나올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 월북하면서 (무슨 정신에) 유정 어른의 유고까지 챙겨 갔겠어요?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죠.”
고통 속에서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장이던 형의 몰락으로 김유정은 누이의 손을 빌려야 했다. 숙식은 물론 담뱃값까지 누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다시 경성 보성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그만두고 말았다. 수중에 한 푼도 없었을뿐더러, 치질과 늑막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웅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쓰신 〈김유정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 유정 어른이 점점 곤궁에 빠져 몸이 쇠약해져 갔고 병원(서울시청 위생진단)에서 폐결핵을 진단받자 모든 일을 슬프게 여겼다고 합니다. 당시 둘째 누이 집에서 살 때였는데 매형 정씨가 누이를 들볶곤 했다고 합니다. 누이 내외와 한방을 쓰던 유정 어른도 상당히 곤욕스러웠을 거예요. 그래서 그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정씨와의 겸상을 피했고, 그런 과정을 겪으며 〈소낙비〉를 썼습니다.”
단편 〈소낙비〉는 1935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소설을 쓰느라 도서관에서 달포가량 고생하고 나선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당선 사례금으로 수중에 돈이 들어와 누이를 돕는 뜻에서 급전을 주고 나니, 약 살 돈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소설가가 됐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찼다.
김유정은 문인으로 활동하며 부지런히 원고를 썼으나 돈을 손에 쥐고 나면 약 대신 술을 먹고 말았다. 술을 한 잔 얻어 마시면 한 잔을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고 한다. 청풍김씨 문중에 따르면, 김유정은 이때부터 자신의 책상 앞 벽에 ‘겸허(謙虛)’라는 글귀를 죽을 때까지 써 놓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일까. 김진웅씨의 말이다.
“삼촌과 조카 사이인 유정 어른과 아버지는 여섯 살 차이가 났는데, 아버지는 삼촌을 신같이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역시 ‘겸허’란 말을 평생 벽에 붙여 놓고 사셨어요. 어릴 때 저는 ‘그저 겸손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 사연을 묻지 않았죠. 나중 춘천에 김유정문학촌이 생기면서 아버지가 쓰신 ‘겸허’란 글이 유정 할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유정 어른의 필체까지 닮으려 하셨어요. 아버지가 쓰신 글씨를 보면 유정 어른 글씨와 흡사해요.”
김유정과 李箱 김유정과 이상은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한 사이다. 김유정은 이상과 가깝게 지냈다. 언젠가 이상이 유정의 집을 찾아왔는데, 손바닥만한 도미 한 마리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도미를 중국집으로 가져가 찜을 해서 먹었다고 한다. 술과 함께. 두 사람은 만나면 술이었다. 몇 푼 안 되는 고료로 으레 술을 마셨고 주머니가 비면 외투를 맡기곤 했는데 김유정은 들뜬 감정을 못 추슬러 늘 앞잡이로 나섰다고 한다. 한번은 김유정이 안회남에게 이런 엽서를 보냈다. ‘이상이 자살할지 모른다’고. 안회남은 깜짝 놀랐다. 사연인즉, 이상이 유정에게 병문안을 갔는데, 몸 져 누운 유정의 몰골을 보고 “이 세상 더 살면 뭐 그리 신통하고 뾰족한 게 있겠소. 둘이서 같이 죽어 버립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정이 “싫다”고 하니 이상이 무안해서 돌아갔다. 김유정은 생의 의지를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병마와 사투를 벌일 생각이었다. 안회남이 이상을 만났더니 껄껄 웃으며 “안형! 제가 동경 가서 일곱 가지 외국어를 배워가지고 오리다”며 시커먼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비비더란 것이다. 결국, 이상을 걱정하던 유정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도 곧바로 뒤를 밟았다. 유정이 1937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나자 한 달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
유정이 마지막을 보냈던 空間
강원도 춘천 신동면 김유정문학촌에 조성된 김유정의 생가 모습. |
기자는 김유정이 마지막을 보냈던 경기도 하남시 중부면 상산곡리를 찾았다. 그곳은 유정의 다섯 번째 누이가 살던 집으로 당시 별채와 안채가 있었는데 유정이 기거하던 별채는 그가 죽은 뒤 결핵환자가 살았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고 한다. 안채 역시 지금은 흔적이 없는 상태다.
유정의 다섯째 누이 이름은 김유흥(金裕興). 아명(兒名)은 흥선, 호적상 이름은 김복달인데 4남3녀를 낳았고 1962년 사망했다. 김유정은 바로 손위 누이와 무척 의지하고 살갑게 지냈다고 한다. 김유흥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회자한다. ‘그녀의 큰오빠 김유근이 서예·사군자·문인화 선생을 집에 모셔다가 글과 그림을 누이동생들에게 가르쳤다. 사치스럽게도 전라도에서 구입한 질 좋은 화선지로 그림을 그렸고, 그 덕에 김유흥은 화조(花鳥)서예를 잘했다’는 것이다.
남편 유세준(兪世濬)씨는 처남 유정의 병환이 깊어지자 직접 그를 들쳐업고 서울에서 하남까지 데려온 인물이다. 과수원(주로 배)을 하던 그는 해방 직후 장티푸스로 병사했다고 한다.
기자는 하남 하산곡동 ‘도예인의 집’에서 유세준의 아들 인근(兪人根·74)씨를 만났다. 그는 광주왕실도자기축제와 세계도자기 EXPO, 대한민국 국제미술대전 추천작가로 활동 중인 도예인이다.
“유정 외삼촌은 말년 타계하기 전까지 하남 산골의 우리집에 자주 오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에 오실 때는 돌아가시려고 온 것 같아요. 병환이 깊어지자 닭도 잡고, 뱀도 잡아 고아 드렸다고 해요. 또 누나(유옥근)를 데리고 동네 물레방아 근처로 산책 가곤 하셨다고 전합니다. 방에 들어가시면 오랜 시간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쓰셨는데 그 방에서 쓰여진 원고는 아버지(유세준)를 통해 서울(신문, 잡지사)로 발송됐다고 해요.”
유정의 형 유근도 자주 다섯째 누이가 살던 하남을 곧잘 찾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발을 절뚝이며 누이집을 찾았다.
“그분(김유근)이 서울 사실 때 마당가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까마귀가 날아와 요란하게 울어 개도 따라 짖고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전날 밤 꿈자리도 뒤숭숭해 유근 외삼촌이 까마귀를 쏘려고 육혈포를 들고 나가다 불행하게도 중문(中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면서 총알이 그분의 엄지발가락을 관통, 불구가 됐다고 합니다.”
그는 큰외삼촌(김유근)에 대한 일화 한 가지를 더 들려주었다.
“큰외삼촌이 재산탕진을 했다고 하지만 독립자금으로도 많이 내놨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물론 돈을 물 쓰듯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분이 춘천으로 낙향한 뒤 어느날, 장독 파는 장수가 왔는데 큰외삼촌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독을 다 깨뜨려 버렸답니다. 그러곤 땅문서 하나를 주었는데 그후로 소문을 들은 독장수들이 독을 지고 춘천으로 다 몰려들었다고 해요.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큰외삼촌이 어느 술집에서 기생과 놀다가, 배가 아파 화장실에서 변(便)을 누는데 밑 닦을 게 마땅치 않았답니다. 마침 노크하는 사람이 있어 급한 김에 지폐로 똥을 닦았다고 해요. 그 일을 기생들에게 얘기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한 기생이 직접 화장실에 가서 지폐를 찾았답니다. 그 후 그분이 그 술집에 나타나면 화장실로 기생들이 뛰어가 변을 뒤졌다고 해요”.
—아버지 유세준은 김유정 집안과 어떻게 해서 결혼하게 됐나요.
“큰외삼촌(김유근)이 아버지의 사촌형인 유원준씨와 의형제를 맺고 일본 유학을 보내드렸는데 그 인연으로 집안끼리 혼례를 올리게 됐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병환이 깊은 유정 외삼촌이 우리집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헌신도 있었지만, 당시 조부모님의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폐결핵 환자를 당신 집에 데려와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하남에는 김유정과 관련,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가끔 자신의 집앞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지핀 후
하모니카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형님(유좌근) 말로는 형제끼리 외삼촌의 바이올린을 탐냈다고 해요. 그런데 돌아가시면서 바이올린도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김유정의 유품과 함께 바이올린도 함께 태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花鳥서예 능했던 다섯째 누이의 후손
도예가 유인근(右)씨와 딸 승현씨. |
유인근의 딸 승현(兪承賢·44)씨도 도예가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2013년 5월 강원도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봄·봄을 노래하다’라는 전시회를, 2015년 9월에는 춘천 출신의 작가 이구화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도자기 종’에다 이구하의 거북 그림이 더해져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두 작가는 2014년 8월에도 김유정문학촌에서 ‘유정, 꽃으로 오다’ 전시회를 함께 열었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강원 춘천에선 노란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불렀대요.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바로 노란 생강나무를 의미해요. 소설 〈동백꽃〉 속 ‘알싸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생강꽃이기에 가능해요. 2013년 전시회 때는 김유정문학촌 후원자 300여 명 이름을 각각의 ‘도자기 종’에다 새겨 넣었어요.”
유승현씨는 “유명한 〈동백꽃〉과 〈봄봄〉 말고도 유정 할아버지 작품 대부분이 봄을 소재로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1935년 쓴 단편 〈아내〉에는 ‘봄의 산아, 피었네 피었네’, 1936년작 〈따라지〉엔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돋고’라는 구절이 각각 등장한다.
그녀는 시인으로 등단, 유정의 예술혼을 이어 받았다. 그녀가 쓴 〈봄·봄을 노래하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동백꽃 무르익고/ 찾아오는 발걸음/ 유정을 사유한다//
시대를 풍미하는 글/ 짧고 굵은 천명/ 절절한 음색과 박절//
천재소설가/ 그의 악보를 펼치며/ 하늘을 연주하다.〉
유승현씨는 “할아버지를 상상하며 자란 꼬마가 전시회를 통해 할아버지와 마주하게 되었다”며 “앞으로 내 시와
도예작품을 나란히 보여주는 전시회를 갖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출처 | 월간조선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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