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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竹林七賢)

yellowday 2016. 1. 13. 21:44

죽림칠현(竹林七賢)

 위진시대에 살았던 완적(阮籍), 혜강, 산도(山濤, 205-283), 유영(劉伶), 완함(阮咸, 3세기 후반경 : 완적의 조카),

향수(向秀), 왕융(王戎, 234-305)의 7명을 가리킨다.

"언제나 죽림 아래 모여 거칠 것 없이 술을 마셔, 죽림 7현이라고 불렀다"라고,

6조 송의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7인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사상적 중심은 혜강과 완적의 두 사람이며, 다시 산도와 향수, 유영과 완함·왕융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죽림이란 방외(方外)의 땅, 즉 자연이란 뜻이다.

조씨의 위(魏)에서 사마(司馬)씨의 진(晋)으로의 정권 항쟁기에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죽림과 술에 자기도회

(自己韜晦)하려고 하였다. 혜강은 반사마(反司馬)의 거병(擧兵)을 하려 했고, 완적은 혜강이 사마소 때문에 형사(刑死)한

다음해에 죽고, 그 다음해에야 사마씨의 진왕조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산도는 이 정권교체기에 79세의 장수를 누리다가, 진나라 원훈(元勳)으로서 죽었다.

<장자>의 주서(註書)를 쓰고 은일(隱逸)의 뜻을 보인 향수도 사마소에 사관(仕官)을 구했다.

완적에게서 속물이란 평을 받은 왕융은 진나라 시대까지 장수했으며, 인색하여 밤낮 돈계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주덕송(酒德頌)>을 쓰고, 언제나 술을 휴대하고, 종자(從者)에게 괭이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내 죽은 곳에 나를 묻어라" 하고

기이한 말을 토한 유영의 과대한 도가적 언사는 자기도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계절(季節)에 명철보신(明哲保身)

하지 않으면 안 된 중국의 사군사(士君士)들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전해 내려온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