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찌그덕, 찌그덕… 詩에 취해 時만 낚아도 좋으리

yellowday 2014. 3. 7. 05:03

 

입력 : 2014.03.06 04:00

전남 보길도 낚시여행


	청별항 앞바다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어부사시사) 구절이 절로 흘러나온다.
청별항 앞바다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어부사시사) 구절이 절로 흘러나온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물외(物外)에 좋은 일이 어부 생애 아니러냐. 책상에 앉아 '어부사시사' 몇 구절을 중얼대다 보면 낚시를 잊고 뱃전을 두드리는 어부처럼 손가락이 저 혼자 가락을 찾는다. 시를 지은 윤선도(1587~1671)가 섬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필시 몸이 보내는 중증 신호. 때마침 절기는 춘사(春詞)를 가리키니, 떠나기로 한다. 낚싯대를 챙긴다. 무얼 낚을 건가? 시(時)든 시(詩)든 뭐든 좋다. 장소는 이미 정해졌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전남 보길도는 완도에 있는 화흥포여객터미널에서도 배 타고 40분을 더 들어가야 하는 먼 섬이다. 1637년, 임금이 병자호란에 굴복하자 모든 걸 체념하고 제주도로 내려가던 윤선도를 잡아 세운 건 보길도의 풍광이었다. 남해 먼바다에 내려진 풍랑주의보가 오전에 풀렸다. 멀리 전복 껍데기 같은 섬의 푸른 등짝이 드러난다. 천지는 폐색(閉塞), 바다만 의구하다.

노화도에서 내린 뒤 보길대교를 건너 차로 10여분 달리면 보길도 청별항이 나온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이동식(77)씨의 배를 빌렸다. 50년 넘은 나룻배다. 모터보트를 마다하고 목선을 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노 젓는 소리 때문이다. 찌그덕 찌그덕, 3m쯤 되는 긴 노가 물을 밀어낸다. 늙은 나무끼리 살을 비빌 때마다 수심에 둥근 주름살이 인다. 지국총 지국총, 청별항 맞은편 장사도를 지나 20여분 노를 저어 배를 멈춘다. 보급형 막낚싯대를 꺼내 낚싯바늘에 새우 두 마리를 꿴다. 어사와, 채비를 던졌다.

이맘때 청별항 앞바다에서 낚을 만한 건 기껏해야 붕장어나 노래미·볼락 정도여서 낚싯대엔 그저 손만 얹어두고 팔자 좋은 어부 흉내를 내기로 한다. 나룻배 고물에 걸터앉으니 섬을 두른 단애취벽(丹崖翠壁·붉고 푸른 절벽)이 지척이다. 사방에 놓인 가두리를 바라보며, 무럭무럭 살찌고 있을 전복과 다시마 따위를 떠올린다. 거구세린(巨口細鱗·농어)을 낚으나 못 낚으나 관계가 없어진다. 이어라 이어라, 찌는 무심히 출렁인다.


	윤선도가 살던 낙서재. 독서와 학문을 즐기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윤선도가 살던 낙서재. 독서와 학문을 즐기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윤선도는 섬 곳곳에 낙서재·세연정·곡수당 등 건물 25채를 짓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붙였다. 동네가 연꽃 같다는 뜻이다. 청별항에서 10분쯤 차를 몰면 부용마을에 있는 '낙서재(樂書齋)'에 닿는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살고, 죽은 곳이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윤선도가 고른 보길도 최고의 집터라 한다. 낙서재 뒤엔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섰다. 바람이 살살 불 때마다 동백의 시뻘겋고 두툼한 입술이 피리를 부는 것 같다. 낭만주의자였던 윤선도는 자신의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 정원도 꾸몄다.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힌다는 윤선도 원림. 2만5000평(8만3500㎡) 규모의 호사다. 돌다리로 계곡물을 막아 만든 두 연못은 동백이며 솔잎이 떨어져 썩은 탓에 맑은 먹빛이다. 이 먹이 그려낸 그림 가운데에 세연정(洗然亭)이 있다. 사방이 들창으로 열린 밤색 정자에 오르니 갓 물오른 버드나무며 구름다리며 잘생긴 일곱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윤선도는 세연정의 동서 방향에 대(臺)를 세워놓고, 거기에 올라가 악공을 불러 시를 읊고 춤을 췄다. 선계인지 불계인지 헷갈렸을 법하다. 1993년 인간이 복원한 이 세계에 들어가려면 1000원을 내야 한다.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야 돌아가자

입질은 없다. 날이 저문다. 배에서 텅 빈 소리가 난다. 낚싯대를 접고 배를 뭍에 댄다. 보길도엔 식당이 15개밖에 없지만 전복의 고장답게 어느 식당엘 가든 회나 찜·구이 따위의 전복 요리가 있다.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위섬 횟집'으로 간다. 전복을 담수에 문질러 씻은 뒤 썰어 낸 전복회, 칼집을 낸 뒤 20분 정도 오븐에 구운 전복구이가 이마에 참기름만 발린 채 나온다. 전복 시세에 따라 달라지지만, 값은 요리당 2인 기준 6만원 정도. 오도독 전복 살이 어금니에서 찢어질 때마다 남도의 저녁이 깊어진다. 횟집에서 운영하는 민박에서 묵기로 한다.

짐을 풀고 차를 몰아 중리 은모래해변을 지나 섬 동쪽 끝자락 백도리까지 간다. 거기 우암 송시열(1607~89)이 시문을 썼다는 '글씐바위'가 있다. 송시열은 윤선도의 정적(政敵)이었다. 운명이 둘을 한곳에 불러 세웠지만, 송시열을 붙잡은 건 풍광이 아닌 풍랑. 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렸다 숙종의 눈 밖에 나 제주도로 유배 가던 길이었다. 500m 남짓한 오솔길을 걸어 이정표를 따라 놓인 계단을 15m쯤 밟으면 남해로 탁 트인 해안 절벽에 음각된 글이 나온다. 무분별한 탁본으로 훼손돼 알아보기 힘드나 내용은 결국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유배 간다'는 신세 한탄이다. 전국을 떠돌며 16년을 유배 다닌 윤선도가 어부의 삶을 사랑한 것도 입씨름할 이유가 없어서였을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잠겨 있던 만경유리(萬頃琉璃)와 천첩옥산(千疊玉山)이 말없이 민낯을 반짝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폐색이었던 섬이 조금씩 열린다.
                                                                                조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