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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손연재 선수는...

yellowday 2013. 7. 1. 08:03

 

입력 : 2013.07.01 03:04


	최수현 스포츠부 기자
최수현 스포츠부 기자
리듬체조 취재를 맡은지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동안 풋풋한 여고생이 성숙한 대학생으로, ‘유망주’에서 ‘요정’을 거쳐 ‘아시아의 여왕’으로 커간 선수를 관심있게 지켜봤습니다. 바로 손연재(19·연세대) 선수입니다.

 

지난해 5월 우즈베키스탄에서 그와 처음 얼굴을 맞대고 둘이 직접 마주 앉았습니다. 런던올림픽을 석달 앞두고 국제체조연맹 월드컵 시리즈에 출전한 그를 숙소에서 만난 것이죠.

투명해 보일 정도로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터뷰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방에서 간단한 화장을 하고 나왔는데, 해맑은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기자 입장에서 손연재는 인터뷰하기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단어라도 한두 개 말해줘야 기사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데, 손연재는 늘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야무진 ‘정답’만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를 쓰면서 고민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2013년 6월 15일 손연재가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LG휘센 리드믹 올스타즈’리듬체조 갈라쇼에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손연재는 15일부터 이틀간 열린 갈라쇼에서 멜리티나 스타니우타(벨라루스), 안나 리잣디노바(우크라이나)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다. /조선일보 DB
2013년 6월 15일 손연재가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LG휘센 리드믹 올스타즈’리듬체조 갈라쇼에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손연재는 15일부터 이틀간 열린 갈라쇼에서 멜리티나 스타니우타(벨라루스), 안나 리잣디노바(우크라이나)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다. /조선일보 DB

수많은 팬 만큼 ‘안티 팬’과 ‘악플’도 많아

아마도 그건 손연재가 어려서부터 ‘안티 팬’들의 비난과 악플에 시달려온 것과 연관이 있을지 모릅니다. 손연재만큼 ‘논란’을 많이 몰고 다니는

스포츠 스타도 드뭅니다. 처음엔 ‘실력도 뛰어나지 않으면서 예쁜 외모와 언론 플레이를 이용해 과대 포장된 선수’라는 비난이 많았습니다.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결선에 진출해 세계 5위에 오르는 장면이 전국에 TV 생중계된 후에도 악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아시아선수권대회 때는 경기 영상을 중계하는 해외 인터넷 사이트 채팅방에서 ‘안티 팬’이 한국말로 욕설을 해 강제 퇴장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손연재는 지난해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과 관련된 악플에 대해 얘기하면서 “저는 그냥 고등학생일 뿐인데...”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대통령 후보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명품 가방을 들고 등교해서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손연재의 국제대회 출전을 놓고 대한체조협회와

 매니지먼트사가 갈등을 빚었을 때는 협회 홈페이지와 사무실 전화가 팬들의 항의로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손연재는 대중의 관심 한복판에 있습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손연재는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메달을 바라보며 새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는 월드컵 시리즈 5개 대회에서 동메달 2개를 따냈지만, 올해는 상반기 4개 대회에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올 6월초 아시아선수권에선 한국 선수 사상 첫 금메달을 3개나 따내며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도 통하는 손연재의 경쟁력은 뭘까요. 리듬체조 관계자들은 손연재의 탁월한 회전 기술과 표현력을 첫손으로 꼽습니다.

손연재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유연성은 다소 부족하지만 회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애티튜드 피봇과 퐁쉐를 연결하는 고난도 복합 회전, 제자리에서 한쪽 다리를 굽혔다 펴며 연속으로 도는 멀티플 푸에테 피봇은 손연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손연재는 올해 초 루마니아에서 열린 리듬체조 심판 강습회에서 ‘표현력의 교본’으로 선정됐을 만큼 표정 연기와 감정 전달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마침 올해 새로 바뀐 리듬체조 채점규칙에서는 회전과 표현력이 특히 강조됐습니다. ‘화려하고 예술성 높은 연기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자’는 취지입니다.

리듬체조 채점규칙은 크게 기술 점수와 예술/실시 점수로 구성되고, 기술 점수는 다시 신체 난도(점프/밸런스/회전)와 수구 난도로 이뤄집니다.

새 규칙에선 회전 수가 늘어날 때마다 높은 가점이 매겨집니다.

또 음악의 박자, 리듬, 강약이 신체 움직임과 얼마나 조화를 잘 이루는지, 음악의 느낌이 얼굴 표정으로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되는지 등을 평가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감점을 적용합니다. 손연재에겐 매우 유리한 변화입니다.

 

그는 마인드컨트롤을 잘 하는 선수입니다. 리본을 떨어뜨리거나 곤봉을 놓쳐도 크게 당황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강심장 훈련’이라도 받는 걸까요?

그는 이에 대해 “속으로는 나도 엄청 당황하지만 실수도 경기의 일부이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연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가 24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인터뷰를 하고 있다./뉴시스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가 24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인터뷰를 하고 있다./뉴시스

2010년부터 러시아에서 홀로 전지훈련샐러드만 먹으며 하루 7~8시간씩 살인적인 훈련

능숙한 기술과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력 뒤에는 사실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손연재는 2010년부터 가족도, 친구도, 통역도, 매니저도 없이

러시아 노보고르스크 센터에서 혼자 전지훈련을 했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어에 능통하지만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았고,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

훈련을 시키는 시스템은 16세 애띤 소녀에게 너무 냉혹했습니다.

하지만 손연재는 특유의 승부욕과 성실성으로 혹독한 훈련을 감당해냈습니다. 처음엔 외로워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손연재를 전담으로 가르치는 옐레나 니표도바

코치는 “이렇게 성실한 선수를 본 적이 없다”면서 “총명하고 늘 부지런히 움직이며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선수”라고 평가했습니다.

체중 감량 때문에 샐러드만 먹으면서도 하루 7~8시간씩 훈련을 이어갔고, 그 사이에 실력은 날로 급상승했습니다. 지난해 7월 캐나다의 ‘허프포스트’는

“손연재가 중요경기가 있을 때는 저녁까지 굶는 ‘익스트림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지요. 손연재는 “남들이 훈련할 때 회전 한 바퀴를 돌면

나는 어떻게든 두 바퀴를 돌겠다”고 이를 악물었다고 합니다.

 

연간 3억원 가까이 드는 훈련 비용은 광고 출연료와 후원금 등으로 충당했습니다. 손연재의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배인 신수지는 “연재는 어릴 때부터

내 옆에 바싹 붙어서 큰 대회 경험이나 기술, 훈련 방법 등에 대해 이것저것 정말 많이 물어봤다”며 “언제나 더 잘하려고, 발전하려고 애쓰는 선수였다”고

했습니다. 런던올림픽 이후 손연재는 전세계 리듬체조 팬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스타가 됐지만, 이미 올림픽을 치르기 전인 작년 5월 타슈켄트

월드컵 현장에서 확인한 손연재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연자이 썬!”이라고 호명되는 순간 잠잠하던 현지 관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고,

 손연재가 연기를 하는 내내 박수와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리듬체조의 변방이자 불모지(不毛地)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온 낯선 소녀를 향해 관중은 왜 그토록 열광한 걸까요?

현지 리듬체조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직접 물어보니 “sunny” “beautiful” “I love her smile”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뛰어난 표현력을 갖춘

손연재가 국경을 초월해 관중과의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유명 리듬체조 안무가인 이리샤 블로이나는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손연재는 아주 용감한 소녀다. 무대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빛이 나서 모든 이에게 에너지가 전달된다. 이는 선수로서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데 요즘 다른 선수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밝고 맑은 모습이 심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손연재의 심리 상담을 맡아온 조수경 박사에 따르면 손연재는 몇 년 전부터 ‘어느 대회 몇 등’이 아니라 ‘행복한 리듬체조 선수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나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표현하면서 스스로 감동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그 감동을 전하는 것’으로 정의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체조는 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존재이자, 지금의 저를 있게해준 원동력이에요”라며 “행복한 선수로 은퇴하는 게

꿈이에요. ‘아 내가 리듬체조를 하길 정말 잘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외국 대회에 출전하면 현지 꼬마 팬들이 몰려들어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고, 해외 리듬체조 용품 업체들로부터는 광고 모델 제안이 잇따르고 있으니

그는 과거의 악평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이뤄가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