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1991년>
대학 입학시험을 마친 고3 졸업 무렵, 강릉 경포 바닷가 윌(will)이라는 카페에서 안도현(47)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읽었다. 옆에 진눈깨비 몰아치던 바다가 있었다.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바다로 내리는 진눈깨비는 한 자 세 치는커녕 바닷물에 닿자마자 사라져갔다. 왜일까. 심장에 무거운 바윗돌을 얹은 것처럼 열여덟 살의 나는 서러웠다. 1987년 겨울이었다.
안도현은 한결같은 '연애쟁이'다. 20년 넘게 참으로 줄기차게 시와 연애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시와 삶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거의 하나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그 둥글디 둥근 꿈만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노라"고. 시와의 연애가 자기 삶의 전부라는 듯 닥치는 대로 털어서 시 쓰고 시를 설파하고 시를 찬양하는 그의 애정 공세는 낭만주의자의 연애법. 이 낭만주의자는 세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흘러나오는 생동감을 특유의 통찰력으로 이끌어내어 따뜻한 서정을 빚는다. 낭만이 사라지는 시대에 안도현 같은 낭만주의자가 한 가마니쯤 있어주면 좋겠다. 그러면 빈한한 세속의 삶이 조금은 위로 받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 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강〉) 가히 사랑의 연기법(緣起法)이라 할만하다. 표면이 아닌 이면의 역사를 상상하는 안도현의 이런 노래가 흘러가서 여치소리를 듣는 방법을 보자.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 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 두는 것'(〈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부분)이란다. 나는 무릎을 친다. 대상에 대한 공경이 만드는 이런 일치와 이런 거리. 안도현에 따르면 사랑이란 정면에 서는 게 아니라 옆에 서는 것이다. 옆에 서서 서로에게 간격과 틈을 허락하고, 그 사이로 강물이 들고 나고 여치소리가 스미는 것을 바라보고 듣는 일이란다. 그게 바로 사랑이란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신지. yellowday 옮김
'애송詩 사랑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 파문 -권혁웅 (0) | 2012.11.23 |
---|---|
[27] 세상의 등뼈 - 정 끝 별 (0) | 2012.11.23 |
[2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0) | 2012.11.23 |
[24] 원 시 (遠 視) -오세영 (0) | 2012.11.23 |
[23]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