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옥중 서신' 검열 폐지

yellowday 2012. 9. 22. 07:12

입력 : 2012.09.21 21:46

이탈리아 공산당원 하나가 소련의 실상을 체험해 동지들에게 전해 주겠다며 모스크바에 들어갔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소련은 편지를 검열할 게 뻔하니까 본 그대로 전하는 내용은 청색 잉크로, 본 것과 반대로 쓰는 내용은 녹색 잉크로, 보통 내용은 흑색 잉크로 써보내겠네"라고 했다. 얼마 뒤 그가 보낸 편지는 모두 흑색 잉크로 쓰여 있었다. 친구들은 소련이 지상낙원은 아니지만 서방에서 비난하는 만큼 나쁜 나라도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편지 맨 끝에 추신이 달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곳에선 녹색 잉크를 살 수 없었네." 작가 솔제니친이 소련을 '수용소'에 비유했던 시절 유행했던 유머다.

▶그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멤버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1926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체포돼 20년형을 받았다.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쓴 것이 '옥중수고(手稿)'다. 이 글은 공산주의 이론사(史)에서 중요한 저술이지만 난해하기로도 이름 높다. 그람시가 검열을 의식해 암호나 우회적 표현을 수없이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 혁명가 트로츠키를 '브론슈타인', 마르크스주의를 '현대의 이론' 또는 '실천철학'이라고 썼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우리나라 감옥에 '비둘기를 띄운다'는 말이 있었다. 재소자들이 당국이 검열하는 편지엔 못 쓰는 얘기를 써서 갖가지 방법으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말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투옥됐던 김찬국 전(前) 연세대 신학대학원장은 팬티 허리춤의 하얀 고무 밴드를 이용했다. 너비 0.8㎝, 길이 30여㎝ 되는 고무 밴드 위에 먹지를 대고 못으로 눌러 글씨를 쓴 뒤 다른 세탁물과 함께 부인 성창운 여사에게 보냈다.

▶"꿈에 성 여사 자주 만남" "나와 친했던 사형수 2인 20일 가다(사형 집행되다)"…. 김 교수가 이런 글을 적어 보내면 성 여사 역시 고무 밴드에 "(당신은) 정의와 진리의 용사"라고 적어 세탁물 반입 때 들여보냈다. 긴 글을 쓸 수 없어 문장은 토막토막 끊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에 있을 때 과자 봉지에 편지를 써 내보냈는데 그나마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같은 이름은 영어 이니셜로만 표기했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최근까지도 재소자들은 밖으로 보내는 편지 봉투를 봉할 수 없었다. 엊그제 법무부가 마약사범·조직폭력배 같은 경우만 제외하고는 옥중 편지 검열을 폐지하는 형(刑)집행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지난 2월 헌법재판소가 편지 검열 제도에 위헌 결정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어두웠던 시절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옥좼던 굴레가 참으로 질기게 남아 있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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