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지정 번호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지정일
1964년 12월 24일
전승지
전라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求禮
求禮는 統一新羅時代인 757년부터 사용한 地名이라고 한다. 求禮는 1751년 李重煥저술의 人文地理誌 ‘擇里志’에 ‘3大3美의 땅’으로 소개되었다. 이는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智異山과 淸淨河川 蟾津江 그리고 千年古刹 華嚴寺등과 친환경농산물, 수려한 자연경관 및 넉넉한 인심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求禮郡守 ‘서기동’씨는, 취임후 야생화생태공원, 생명체험학교를 포함한 실버허브타운 조성등 자연친화적인 관광자원을 크게 확충하는등 맹활약중이라고 한다. 그분으로부터는, 우리 58會의 관광단에게 壓花전시관등 모든 郡廳直營시설의 입장료를 무료로 후대해주셨고, 떠나올 때는 ‘求禮産名品오이’ 2box(40個入), 지리산산수유영농조합법인의 ‘산수유약주’(山茱萸藥酒)375cc의 술을 역시 2box(40甁入), ‘智異山山東천연수’(500cc)4박스도 우리들이 마시고 남겨서 가져올 만큼 넉넉히 보내주셨다. 참으로 우리들을 지극히 환대해주셨고, 觀光解說者도 2명을 특별히 파견해주시어, 東便制관람시, 四聖庵방문시, 華嚴寺방문시에 각각 시원한 해설을 들려주시도록 배려해주셨다. 참으로 매우 드물고 고마우신 배려와 환대였다고 생각한다. 서기동 郡守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섬진강
求禮이야기를 하자면 섬진강을 빼놓을 수 없다. 길이 225㎞, 유역면적 4,896㎢. 전북진안군팔공산(1,151m)의 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정읍시와 임실군의 경계에 이르러 갈담저수지(일명 옥정호)를 이룬다. 순창·곡성·구례를 남동쪽으로 흐르며 河東과 光陽의 경계에서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고려시대 1385년경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蟾津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앞서 설명했드시 ‘東便制공연을 觀覽하자‘는 것이 主目的이었다. 東便制를 알려면, 판소리를 알아야 하고, 또 西便制도 알아야 그림이 선명해진다. 그래서 먼저 간단히 ‘판소리’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판소리
부채를 든 1名의 창자(唱者)가 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唱(소리)·아니리(사설)·발림(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劇的音樂이다. 本來는 모두 12마당이었으나, 현재는 春香歌, 心淸歌, 水宮歌, 興甫歌, 赤壁歌 5마당만이 전해진다. 판소리의 기원에 관해서는, 巫歌起源說, 광대소학지희(笑謔之戱)기원설, 육자배기토리기원설, 판놀음기원설등이 있다. 巫歌기원설은 판소리가 일반적으로 육자배기토리권(全羅道, 忠淸道, 京畿道南部, 慶尙道西部)의 巫歌와 유사한 점이 많은 데 근거한다. 특히 무가의 담당층, 음악적 특성, 소재, 삽입 가요 등에서 광범위한 동질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대개 판소리의 음악은 巫歌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판소리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7세기경 남도지방에서 서민청중들을 대상으로 서서히 부상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적어도 18세기말까지는 판소리가 제 모습을 완전하게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보다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西便制 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王室에까지 침투하게 되고, 高宗과 興宣大院君으로부터 많은 창자들이 벼슬을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청중이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바뀌었다.
덕분에 판소리는 사설·음악·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었으나, 민중적 현실인식과 반봉건적 예술적 심화나 문제의식은 일정하게 수정되어 얼마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까지도 허용하는 굴절을 겪었다.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申在孝1812~84)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을 매개로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6마당의 사설집과 〈성조가 成造歌〉·〈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만들어졌다.
20세기는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마침내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판소리는 무대예술로 변화했다. 1902년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지고, 판소리가 이 공연무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극적 요소가 강한 창극이 탄생했다. 또한 留聲機의 출현으로 판소리의 향수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女唱이 된 이후 다수의 후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8·15해방 후 판소리는 여성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해, 1960년대에는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판소리의 몰락 이후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196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제5호)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소생의 계기를 맞은 판소리는,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지식인·학생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西便制
섬진강 서쪽인 光州·羅州·寶城등지에서 많이 불렸다. 선천적인 성량에 의존하는 東便制와는 대조적으로 西便制는 기교와 수식의 맛이 중요하다. 소리 한 꼭지를 몇 장단에 걸쳐 끌고가다가 어떤 마디에 이르러 소리를 만들고 다시 끝을 맺는다. 발림이 많이 들어가고 연기적인 면이 강하다. 이때문에 서편제는 정교하며 감칠맛이 있다. 〈춘향가〉의 '이별가', 〈심청가〉의 '효성가', 〈적벽가〉의 '사향가'가 있다. 西便制 가운데 박유전제는 그 시조로 삼고 있는 박유전(朴裕全)의 호를 따 '강산제'라고도 한다.
東便制
섬진강을 둘러싼 전라북도 운봉·구례·순창·흥덕등지에서 많이 부른다. 우조(羽調)의 한 계열로 송흥록(宋興祿)의 법제를 표준으로 한 것이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우기는 소리’로 ‘막 자치기 소리’라고 한다. 섬세한 기교보다는 곧게 내리지르는 통성을 쓰기 때문에 거칠면서도 호방한 맛이 있다. 따라서 동편제 소리를 제대로 하려면 풍부한 성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동편제의 표현성이 두드러진 대목은 〈춘향가〉에 송광록·박만순·김세종·장자백·김상국·성창렬·박녹주의 것이 있고, 〈수궁가〉에 송우룡·정춘풍·김찬업의 것이 있고, 〈심청가〉에 전해종·송만갑·진도성의 것이 있으며, 〈흥보가〉에 김도선·박기홍의 것, 〈적벽가〉에 김창록·서성관의 것 등이 있다. 우주필님 블에서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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