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yellowday 2013. 7. 15. 06:52

 

순종과 명성왕후(?)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인의 사진첩에 등장하는 사진중에 순종의 사진과 명성왕후로 추정되는

사진[테리 베닛씨 제공/연합]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1],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의 비극을 겪었으며,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일본 정부와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4]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5]

 

입궐과 그리고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남편 고종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18][19]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는데 이 점 역시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인 흥인군 이재면(李載冕),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20][21]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엔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22][23][19]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하였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럴 무렵 세 돌 된 완화군이 갑자기 죽자, 명성황후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쫓아냈다.[20] 흥선대원군이 귀인 이씨의 아들

완화군을 총애하던 것과 달리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는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고종의 친정 유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북인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 투쟁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20] 이어 흥선대원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李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4][25][19]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일가 친척과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26]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27]고 한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민씨 세력을 등용하여 보호 세력을 양성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탄핵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28]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29]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30]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