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개혁은 점진 개혁과 급진 개혁으로 대별되는데 급진 개혁의 경우 그 선각자의 말로들은 처참했다. 중종에게 사랑을 받았던 조광조(趙光祖)가 사약을 마셔야 했고 고종에게 사랑을 받았던 김옥균은 육시 효수(梟首)를 당했던 것이다. 상하이 일본인 경영의 동화양행에서 사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잽싸게 활동한 일본인 오카모도(岡本柳之助)에 의해 일본으로의 송환이 준비되고 있었다. 오카모도는 한국침략의 첫발인 운양호(雲揚號) 포격사건때 구로다(黑田) 전권특사를 수행 공작했고 민황후(閔皇后) 시해때 직접 뛰어든 자다. 한데 갑신정변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청나라 정부의 입김으로 시신은 청국 군함 위정(威靖)호에 실려 인천 외해에서 한국배에 인도되었고 한강을 타고 형장(刑場)인 양화진에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김옥균을 인조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에 준해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받아들여 시신을 여섯 토막 내고 머리를 효수, ‘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쓴 깃발을 날려 한강변에 전시했다. 그리고 육시(六屍)를 나누어 끌고 팔도 시장을 고루 돌아다닌 끝에 버렸다.
함경도 북단에 매골모루(埋骨?)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은 강원도 함경도에 끌고 다녔던 죄인의 왼다리를 묻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옥균의 시신은 사라져버렸고 시신이 없으면 머리털이나 손톱 발톱 혈흔(血痕) 등 신체의 일부나 유품 유필 등으로 무덤을 쓰는 관행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에는 김옥균을 후원하는 일본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모여 김옥균의 머리털을 구해 도쿄의 아오야마(靑山) 묘지에 무덤을 만들었다. 순종때 김옥균은 복권되었고 그의 부인 유씨(兪氏)가 작고했을 때 임금은 100원의 부조금을 내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강제병탄후인 1913년에는 아산(牙山)군 영인면 백석리에 역시 유발(遺髮)로 김옥균의 무덤을 만들었고 그 이듬해에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성대한 위령제가 베풀어졌었다.
보도된 바로 김옥균의 아오야마 묘지가 관리비를 5년 동안 내지 않았다 하여 도쿄도지사의 행정명령으로 철거령이 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100여년 탈없던 무덤이요 우익인사로 알려진 도지사의 명령이고 보면 행여 독도나 교과서 문제와 맥락이 있는 앙심이 아닌지 갸우뚱해진다.